불교역사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관리자 | 2006.03.14 05:06 | 조회 5044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1. 불교정책과 대중의 불교

왕실의 불교관 신라에 의해 삼국의 통일이 이뤄지면서 사회는 크게 변하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는 불교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불교계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불교의 정치이념으로서의 역할이 축소되었고, 그 대신에 개인의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측면이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삼국시대의 불교는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수용되면서 국가체제의 정비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불교사상을 이용한 측면이 많았다. 반면 통일신라에서는 불교의 철학적, 종교적 측면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면서 세계와 인생의 가치에 대한 반성 및 불교신앙을 통한 대중들의 삶의 위안 등이 보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삼국통일을 이루어 낸 중기 왕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또한 태종무열왕(김춘추) 이후의 왕실에서는 왕실의 정당성을 종교적 신성성이 아닌 군주의 도덕적 자질과 백성들에 대한 실제적 혜택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하는 유교적 정치이념에서 찾고자 하였다. 이는 불미스럽게 폐위당한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가 이전의 국왕들처럼 신성함을 주장하기에 부족했다는 출신상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관련된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그보다는 당시에 불교적 신성성을 근거로 하여 왕실의 권위를 내세운다는 것은 이미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불교 수용 이후 신라가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대외적으로 팽창하면서 불교적 정치이념은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선덕여왕대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으로 국가의 세력이 위축되면서 불교적인 수식만으로는 왕실의 권위를 내세우기 어려운 상황이 나타나고 있었다. 더욱이 여왕의 즉위에 불만을 가진 일부 정치세력들이 여왕의 교체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키는 등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또한 격화되어 가는 삼국의 항쟁 속에서 백성들의 자발적인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정책들도 필요해졌다. 이에 따라 이제는 실제적으로 정치를 안정시키고 외국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정치적 운영이 절실하게 요구되었고,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왕위에 오른 김춘추는 불교적 정치이념 대신 국왕의 실제적 능력과 백성에 대한 덕치(德治)를 강조하는 유교적 정치이념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김춘추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웃 나라들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하여 고구려는 물론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외교 활동을 벌였고 가야 왕실 출신인 김유신과 함께 군사력을 증강시키기 위한 노력을 벌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왕실의 입장만이 아닌 일반 백성들의 입장을 고려하는 새로운 정치운영 원리를 모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춘추의 아들로 통일을 달성하였던 문무왕이 ‘용은 미물로서 국왕에게는 적합하지 않다’라는 승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안정을 위하여 스스로 동해의 용이 되고자 했던 것은 불교적 신성함보다 국가와 백성에 대한 군주의 책임을 강조하는 왕실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삼국통일을 이룬 중기 왕실이 정치운영에 있어서 불교보다 유교의 원리를 중시하였지만 불교에 대한 신앙을 경시했던 것은 아니다.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은 사후에 자신의 유해를 불교식으로 장사 지내라고 유언했고, 고승들에 대한 왕실의 귀의도 여전하였다. 또한 선왕들을 위한 원찰을 건립하는 것도 중기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은 대부분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었고 불교를 정치에 직접 이용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정치에서 불교적 이념 대신 유교적 원리가 강조되면서 불교계에 대한 운영방식도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통일 이전에는 자장을 대국통에 임명하고 불교계의 운영을 맡긴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가 직접 불교계를 통제하기보다는 자율적인 운영을 중시하였다. 반면에 통일 이후에는 이러한 불교계의 자체적인 조직과 별도로 중앙에 불교계의 운영을 담당하는 관청인 정법전(政法典)을 설치하고, 일반 관료들이 불교계에 관여하도록 하였다. 또한 주요 사찰을 건립하고 운영하는 일도 승려가 아닌 고위관료들이 담당하였다. 불교의 대중화 통일신라에 들어와 정치이념으로서의 불교의 영향력은 축소되었지만 불교의 사회적 비중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통일기에는 일반대중들의 불교신앙에 대한 참여가 확대되어 불교가 사회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불교가 주로 왕실이나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지배층 위주의 신앙체계였다면, 통일 이후의 불교는 지배층은 물론 하층민까지 포함하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신앙으로 발전되었다. 불교 대중화라고 불리는 이와 같은 변화를 주도한 사람들은 통일전쟁기를 전후하여 활동하였던 일군의 승려들이었다. 이들은 왕궁이나 사찰이 아닌 시장과 마을을 다니면서 불교의 가르침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직접 서민적 신앙생활을 보여 주었다. 이로 인하여 일반대중들은 불교를 가깝게 접할 기회를 갖고 자신들의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진평왕대에 활동한 혜숙(慧宿)은 이러한 불교 대중화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본래 화랑의 낭도에 속하였던 혜숙은 600년에 안홍과 함께 중국 유학을 시도했지만 풍랑으로 실패한 후에는 시골에 숨어 살면서 일반대중들과 함께 수행과 교화를 하였다. 전기에 의하면, 그는 사냥하러 온 국선(國仙)에게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줌으로써 살생을 그치게 하였고, 그의 명성을 들은 국왕이 초청했을 때에는 일부러 여자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지배층보다는 민중 속에 있기를 택했다고 전한다. 혜숙에 이어서 불교의 대중화에 힘쓴 인물로 혜공(慧空)과 대안(大安)이 있다. 혜공은 원래 귀족 집안의 심부름꾼 출신이었지만 타고난 재능을 드러내어 출가할 수 있었다. 교학에 뛰어났고 종종 특별한 이적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출가한 이후에는 작은 절에 살면서 삼태기를 둘러쓰고 길거리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며 일반대중들과 함께 지냈다. 대안 역시 당시 불교계의 대표적인 학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궁의 초청이나 호화로운 생활을 거부하고 스스로 미친 척하며 거리에서 일반대중과 어울려 지냈다. 이와 같은 불교 대중화의 흐름을 계승하여 일반인들에게 불교신앙을 폭 넓게 전파한 인물이 원효(元曉)이다. 중급관료 집안 출신인 원효는 출가하여 불교학을 깊이 연구한 이후에 세간과 출세간의 걸림이 없음을 직접 실천하기 위하여 환속하였고, 이후에는 스스로 소성(小姓)거사로 자처하면서 광대들의 놀이도구를 가지고서 수많은 마을과 거리를 다니면서 노래와 춤으로써 불법의 가르침을 전했다. 또한 그는 모든 중생들이 염불을 통하여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는 아미타 정토신앙을 강조했다. 이러한 원효의 교화에 의하여 미천한 사람들까지도 불교를 알게 되었고, 곳곳에서 ‘나무 아미타불’을 염송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대중적 불교신앙의 발전 불교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퍼지고 개인의 신앙으로서의 성격이 강화되면서 불교신앙의 내용도 대중들의 개인적인 평안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통일기에 가장 성행했던 것은 서방극락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아미타신앙과 현세의 고통을 덜어 주기를 기원하는 관음신앙이었다.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은 이미 삼국시대에도 행해지고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승려들이 죽은 부모를 위하여 무량수불, 즉 아미타불을 만들어 봉안한 사례가 있고, 백제의 경우에는 현존 유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일본의 사찰 연기설화에 백제에서 본 아미타불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다. 신라에서도 자장이 『아미타경소』와 『아미타경의기』를 저술하여 아미타신앙에 대하여 소개했었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자료에는 아직 서방극락에 왕생했다는 구체적인 이야기들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오면 서방극락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아미타신앙의 적극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실제로 왕생했다는 신앙 사례들도 등장하고 있다. 또한 신앙의 주체도 하층민들을 포함하는 사회구성원 전체로 확대되고 있다. 아미타 불상이 대량으로 만들어진 때도 통일기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통일기의 아미타신앙의 구체적 사례들은 『삼국유사』에 자세히 들어 있는데, 죽은 사람들의 극락왕생을 바라는 것과 직접 염불수행을 통하여 극락에 왕생하는 모습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죽은 사람의 왕생을 기원한 사례로는, 문무왕이 동생인 김인문이 당나라의 감옥에 잡혀 있을 때 무사귀환을 위하여 관음도량을 열었다가 그가 죽게 되자 미타도량을 열어 서방 왕생을 기원한 것, 경덕왕 때에 귀족인 김지성이 죽은 부모의 왕생을 위하여 미륵상과 함께 아미타상을 조성한 것, 그리고 승려 월명사가 죽은 여동생이 극락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내용의 「제망매가」를 지은 것 등이 있다. 직접 염불수행을 통하여 극락에 왕생한 사례로는 포천산(布川山)에서 염불을 하던 다섯 명의 승려가 10년의 수행 끝에 성중(聖衆)들의 인도를 받아 극락으로 날아간 것과 노비인 욱면(郁面)이 간절한 염불실천 끝에 살아 있는 몸으로 곧바로 서방에 날아간 것, 그리고 가난한 농부인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 낮에는 생업을 꾸려 나가면서 저녁에 염불수행을 계속하여 극락으로 왕생할 수 있었던 것 등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백월산에 살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각기 미륵과 미타를 예념하며 수행한 끝에 성불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상의 사례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아미타신앙은 국왕과 귀족에서부터 하층민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신앙된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불교신앙이었다. 아미타신앙이 이처럼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간단한 염불만으로 사후에 곧바로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하는 신앙의 내용이 일반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 대중화에 앞장선 승려들이 적극적으로 아미타신앙을 고취한 것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본다. 원효가 그랬듯이, 그들은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아미타신앙을 통하여 하층민들에게까지 불교를 전파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관음신앙은 아미타신앙과 함께 통일기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신앙이었다. 삼국시대에도 관음신앙에 관한 주요 경전인 법화경이 널리 읽혔고 관음보살상들이 만들어졌지만, 통일기에 들어와서는 구체적인 신앙의 사례들이 보인다. 아미타신앙과 마찬가지로 일반인들에 의한 개인적 신앙이 확대되면서 사회 전반에 널리 유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통일기의 관음신앙의 사례들을 살펴보면, 현실의 어려움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 많다. 신앙의 주체 역시 국왕에서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문무왕은 동생의 무사 귀환을 빌기 위하여 관음도량을 열었고, 효소왕 때에는 국선 부례랑이 북쪽지방에서 납치되자 부모가 백률사의 관음에게 빌어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하였다. 경덕왕 때에 장사하러 배를 타고 나갔던 장춘(長春)은 풍랑을 만나 표류한 끝에 중국에서 노비로 지내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민장사의 관음에게 기도한 덕택에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또한 눈먼 아이를 둔 희명(希明)이라는 여인은 분황사의 천수관음에게 기도하여 아이의 눈을 뜨게 하였고, 아들이 없던 최은함은 중생사의 관음에게 빌어서 뒤늦게 아들을 얻게 되었다. 그 밖에도 고승 경흥이 병이 들었을 때에는 관음보살이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춤을 추어 병을 낫게 하였고, 낙산사의 토지를 관리하던 조신(調身)은 연모하던 여인과 맺어줄 것을 관음보살에게 기도한 끝에 그녀와 결혼해 사는 꿈을 꾼 후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미타신앙과 관음신앙은 각기 죽은 사람의 극락왕생과 현실에서의 어려움을 구제하기 위한 신앙으로서 그 역할을 달리하면서 널리 성행하였다. 삼국시대 때 주류를 이루었던 미륵신앙 역시 계속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신앙 사례는 아미타신앙이나 관음신앙에 비하여 극히 적게 나타나고 있고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나 김지성의 불상 건립에서도 보듯이 아미타신앙과 연결되어 나타나고 있다. 승려의 해외 구법 활동 통일을 전후하여 신라의 학승들은 부처님 법을 배우기 위하여 중국은 물론 멀리 인도까지 갔다. 아리야발마와 혜업은 진평왕 무렵 중국을 거쳐 인도로 가 부다가야의 보리사와 마라난타사에서 연구하고 사경하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통일 후 성덕왕대(702~732년)에 혜초(慧超)는 일찍이 당나라로 가서 바닷길로 인도에 도착하여 불교성지를 두루 순례하고 서역 여러 나라까지 답사한 뒤 육로로 서안에 도착하여 이를 기행문으로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왕오천축국전』이다. 지금은 그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신라의 왕족 출신으로 알려진 지장(地藏)은 중국에서 이름을 떨친 고승이었다. 기골이 장대하여 장정 열 사람을 상대할 힘을 가졌고 재주 또한 뛰어났다고 한다. 일찍이 유교를 공부하다 불교에 마음이 기울어져 출가하였다고 한다. 출가한 뒤 오래지 않아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가서 지주(池州)의 구화산(九華山) 봉오리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혼자 수행에 힘썼다고 한다. 그 뛰어난 수행력은 산 아랫마을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져 오래지 않아 큰 절이 조성되었는데, 그 명성이 중국 조정에도 알려졌다고 한다. 이윽고 지장의 이름은 본국 신라에까지 알려져 학승들이 바다를 건너 구화산으로 찾아들었다. 지장은 신라 애장왕 4년(803년)에 99세로 입적하였는데, 앉은 채로 입적하여 시신을 함 속에 넣어 두었는데 3년 뒤에 열어 보니 얼굴 모습이 살았을 때와 똑같았다고 한다.

2. 교학의 발전

통일신라시대는 한국 불교학의 전성기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불교이론들이 발전하였다. 당나라와의 활발한 문화교류를 배경으로 새로운 불교이론들이 지체 없이 수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기초로 하여 불교이론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시기였다. 특히 독자적인 교학체계를 수립한 원측, 원효, 의상 등의 불교학은 신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의 불교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고, 동아시아의 불교학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원측과 유식사상 통일신라시대 교학연구에서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원측(613~696년)이었다. 전기에 의하면, 원측은 신라의 왕족 출신이었다고 한다. 3세에 출가한 후 10여 세의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중국에서 여러 유명한 불교학자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범어와 서역 여러 나라의 언어를 습득하는 등 불교학을 연구할 수 있는 소양을 쌓아 나갔다. 젊은 시절에 이미 불교학자로서의 명성을 쌓았던 그는, 645년 현장(玄斡, 600~664년)이 인도에서 유식학(唯識學)을 공부하고 돌아온 이후에는 이를 중점적으로 연구하여 유식학자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하였다. 특히 658년에 황실에 의해 서명사(西明寺)가 개창된 후에는 그 곳에 머무르면서 유식학의 강의와 주석서 집필에 몰두하였고, 노년에는 측천무후의 발원에 의해 추진된 불경 번역사업에 초청되어 증의(證義)의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그의 저술로는 『해심밀경소』, 『성유식론소』, 『유가론소』 등을 비롯한 10여 종이 있지만, 현재 전하는 것은 『해심밀경소』, 『인왕경소』, 『반야심경찬』 등이다. 또한 다른 문헌에서 인용하고 있는 내용을 모은 『성유식론소』의 복원본이 근대에 편집되었다. 원측의 저술 중 대부분은 현장이 번역한 신유식의 경론들에 대한 주석서로서 신유식의 이론을 체계화하는 것이었다. 현장에 의해 소개된 신유식의 이론은 원측에 의해 사상적으로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장은 경론의 번역에 집중하느라 유식학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저술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신유식의 이론적 체계화는 원측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원측은 저술에서 자신이 이전에 수학하였던 구유식인 섭론학과 현장이 소개한 신유식의 이론적 차이를 자세히 분석한 뒤, 신유식의 이론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원측의 저술에는 신유식의 비판의 대상이 된 구유식의 이론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이미 구유식의 소양을 가지고 있던 원측이 구유식과 신유식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원측의 제자로는 신라 출신인 승장과 도증이 알려져 있는데, 승장(勝莊)은 원측 사후 그의 부도를 건립했으며,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서 불경의 번역작업 등에 참여하였다. 도증(道證)은 원측이 입적하기 전인 692년에 신라에 귀국하였으며, 그를 통하여 원측의 사상이 신라에 전해지게 되었다. 도증에게는 7종의 유식학 저술이 있었는데 모두 흩어지고, 다만 『성유식론요집』의 단편만이 규기 문도들의 저술에 비판적으로 인용되고 있다. 도증은 이 책에서 성유식론에 대한 원측, 규기 등 여섯 명의 주석을 종합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원측의 해석에 중점을 두고 있다. 도증이 원측의 유식학을 전하기 이전에도 신라에서는 유식학이 연구되고 있었다. 원효는 현장이 번역한 논서의 내용을 이전의 유식학 논서들과 대조하여 종합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주로 구유식의 입장에서 신유식을 이해하려는 입장이었다. 백제 출신으로 통일 직후에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 의영(義榮)도 구유식의 입장에 서 있었다. 일본 문헌에 인용된 내용에 따르면 그는 신유식의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1)을 강하게 비판하였다고 한다. 경흥 또한 백제 출신으로서 신문왕(681~691년)에게 국로(國老)로서 존경받았고, 10여 종의 유식학 주석서를 저술했지만, 현재는 그 단편만이 전해지고 있어 상세한 사상적 입장을 알기는 어렵다. 의상에게 화엄학에 대하여 질문한 적이 있는 의적(義寂) 역시 원래는 유식학자로 그의 『성유식론미상결(成唯識論未詳訣)』이 도증의 『성유식론요집』에 인용되어 있다. 도증의 귀국 이후에 활동한 유식학자로서는 도륜(道倫)과 태현(太賢)이 있다. 도륜은 『유가론기(瑜伽論記)』 100권을 지어서 중국과 신라 승려들의 견해를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으며, 태현은 20여 종의 유식학 관련 저술을 남겼다. 특히 태현은 후대에 신라 유식학의 조사로서 추앙받았는데, 그의 『성유식론학기(成唯識論學記)』에는 원측과 규기의 견해가 대등하게 인용되고 있다. 의상과 화엄사상 유식학과 함께 통일신라의 불교학을 대표하는 것이 화엄학이다. 화엄학은 『화엄경』의 내용에 기초하여 모든 존재의 상호연관성과 부처와 중생의 동일성을 해명하고자 했던 사상으로서 당나라 초기에 지엄(智儼, 602~668년)에 의해서 기본적 이론체계가 마련되었다. 신라의 화엄학은 중국에 유학하여 지엄 문하에서 직접 배우고 돌아온 의상에 의해 성립되었다. 의상(義湘, 625~702년)은 경주의 귀족 출신으로서 10여 세에 출가하여 국내에서 불교학을 연마하였으며, 문무왕 원년(661)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중국에서는 장안 근처에 있는 종남산으로 들어가 지엄 문하에서 화엄학을 수학하고 지엄 입적 후 문무왕 11년(671)에 신라로 돌아왔다. 귀국 이후 처음에는 자신이 출가했던 경주의 황복사에 머물다가 얼마 후 문도들과 함께 태백산으로 들어가 부석사를 창건한 뒤 그 곳에서 화엄학을 강의하며 지냈다. 의상의 화엄사상은 그가 저술한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에 잘 나타나 있다. 『일승법계도』는 화엄사상의 핵심을 7언 30구의 시로 요약한 법계도시(法界圖詩)와 그에 대한 해설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법계도시는 문장의 순서가 상하좌우로 회전하는 반시(槃詩)의 형태를 띠고 있어서 법계도인(法界圖印)이라고도 불리며, 지엄의 입적 직전에 교학의 완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지어 바친 것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의상은 모든 존재가 본질적으로 서로 원융하며, 부분과 전체, 순간과 영원, 중생과 부처가 동질적이라고 말한다. 현상세계의 차별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서로 의지함으로써 각각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상은 모두가 차별이 없는 중도(中道)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의상은 상즉상입(相卽相入)과 십현문(十玄門), 육상(六相) 등의 이론들을 차용하고 있다. 이것은 지엄에 의해 창안된 화엄사상의 핵심적 이론들이었다. 특히 상즉상입을 설명하기 위한 구체적 논증으로 제시한 수전법(數錢法)은 지엄의 강의에 기초하여 의상이 창안한 것으로 후대 화엄사상의 이론을 설명하는 이론적 틀로서 널리 이용되었다. 이처럼 화엄사상의 핵심을 간명하게 정리하고 있는 『일승법계도』는 실로 의상사상의 요체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 의상의 문도들은 이 책에 의거하여 화엄사상을 전개해 갔다. 이 밖에도 의상은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抄記)』,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등의 화엄학에 관한 저술이 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의상은 화엄사상의 요체를 간명하게 정리하고 이를 실천하는 수행방법을 체계화하는 데 힘썼던 반면에, 화엄학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거나 다른 불교의 이론과 비교하는 데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화엄학 저술들은 모두 간단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고, 오로지 실천을 중시했다는 점이 그 특징으로 꼽힌다. 이는 그와 동문이었던 법장이 화엄학의 이론을 체계화하기 위해서 방대한 저술을 남기고, 다른 교학과 화엄학의 차이를 규명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점이라 할 것이다. 의상에게는 많은 문도들이 있었는데, 특히 진정, 지통, 양원, 상원, 도신, 표훈 등이 유명하였다. 의상의 화엄학은 처음에는 문도들을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유포되었지만, 신림과 법융, 표훈 등이 활약했던 8세기 중반 이후에는 불교계의 주요한 흐름으로 확립되었다. 하지만 신라의 유식학자들이 다양한 이론을 공부하고 여러 경전에 주석을 붙였던 것과는 달리, 의상의 문도들은 화엄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고 다른 불교이론들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의상의 문도들이 그의 학풍을 전수하여 교학의 체계화보다는 화엄사상의 구체적 실천을 중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원효의 화쟁사상 통일신라의 불교학에 중요한 획을 그었던 것은 바로 원효(元曉, 617~686년)의 교학이었다. 유식학과 화엄학의 연구자들이 중국에서 배웠거나 중국에서 들어온 이론에 토대를 두고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갔던 것과 달리 원효는 중국의 불교학 이론들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구축하였다. 그의 교학체계는 신라 불교학의 중요한 흐름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그의 사상은 중국과 일본의 승려들에 의해서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원효는 경주 근처 압량군(현재 경산군 지역)에서 나마(奈麻)의 관등을 갖는 중급관료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십대의 나이에 출가한 후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수학했던 그는 진덕여왕 4년(650)에 의상과 함께 중국 유학을 시도했지만 고구려의 해상 봉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송고승전』에서는, 이 때 원효가 무덤 속에서 해골의 물을 마시고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을 깨닫게 되어 중국 유학을 포기했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원효는 중국에서 전래된 경전과 주석서들을 스스로 해석하고 이를 전통적인 교학과 조화시키면서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성립시켜 갔다. 현재 알려진 원효의 저술들을 살펴보면, 그는 그 당시에 연구되고 있었던 거의 대부분의 불교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각각의 사상에 대하여 독자적인 이해를 제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가자로서의 생활원리에 충실하고자 했던 의상과 달리 원효는 일반 사회의 문제들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통일 전쟁기인 661년 겨울 당나라와 신라의 군대가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원효는 당나라가 보낸 암호문서를 해독하여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게 하였고, 과부가 된 공주와 결혼하여 설총(薛聰)을 낳아 유학자로 키우기도 하였다. 원효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보살의 중생제도와 대중교화를 중시하였는데, 특히 유마거사와 같은 승속불이적(僧俗不二的)인 태도를 중시했다. 원효가 왕실의 공주와 결혼하게 된 배경에는 통일전쟁을 주도했던 왕실과의 공감도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성들에게 덕을 베푸는 정치를 강조한 왕실의 모습이 중생제도를 중시한 원효의 사상과 통하는 면이 많기 때문이다. 원효가 처음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불교사상은 반야공관(般若空觀)사상 및 법화와 열반의 일승(一乘)사상이었다. 불교 대중화의 선배였던 혜공과 대안은 모두 반야공관사상의 대가로서 원효는 이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반야공관사상을 수학하였다. 그리고 원효는 중국 유학에 실패한 이후에, 의상과 함께 백제 지역으로 옮겨 와 있던 보덕을 찾아가서 열반경을 수학하기도 하였다. 법화경과 열반경은 모든 가르침들이 결국은 하나로 귀결되며, 중생들이 모두 참다운 가르침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일승사상의 대표적인 경전들이었다. 이처럼 원효는 처음에는 반야공관사상과 일승사상을 주로 수학했지만 얼마 후에는 당시 중국에서 성행하고 있던 유식학을 적극적으로 공부하였다. 그는 중국 유학을 단념한 후 중국에서 전래된 저작들을 통하여 유식학의 내용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이를 해설하는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원효의 유식학 관련 저술은 14종 40여 권으로, 총 90여 종에 가까운 그의 저술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분야이다. 그런데 유식학은 현상계의 유적(有的) 측면을 분석하고 소승과 대승의 차이를 강조하는 삼승(三乘)의 교학으로서, 원효가 초기에 수학했던 반야공관사상 및 일승사상과는 대립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특히 유식학은 성불할 수 없는 중생이 있다는 오성각별설을 주장하여 모든 중생의 성불을 주장하는 일승사상과는 서로 모순되는 입장이었다. 원효는 이후 이러한 사상적 차이를 해명하고 조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그 과정에서 독자적인 사상체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원효가 반야공관 및 일승사상과 유식학의 사상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주목한 것은 기신론의 사상체계였다. 기신론에서는 일체 존재들은 중생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마음, 즉 일심(一心)의 발현이며, 그것은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으로 구분되지만, 양자는 동일한 마음의 고요한 측면과 움직이는 측면을 구분한 것으로서 실제로는 하나로 동일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원효는 기신론의 사상을 여러 불교이론을 종합하는 사상으로 평가하였다. 그는 『대승기신론별기』에서 기신론이야말로 “여러 논서들 중에서 우두머리요, 많은 논쟁을 없앨 수 있는 주인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이처럼 기신론을 높이 평가한 원효는 기신론에서 이야기하는 일심을 대승의 핵심사상으로 파악하기에 이른다.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존재들은 일심의 발현과 다를 바 없으며, 그 일심은 모든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는 것이 대승사상의 핵심이라고 파악한 뒤, 불법의 목적은 이러한 일심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와 동시에 원효는 금강삼매경을 중시하였는데, 차별이 없는 절대의 진리를 체득할 수 있는 관행(觀行)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금강삼매경의 핵심을 ‘일미관행(一味觀行)’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일미’란 차별이 없는 절대적인 경지를 가리킨다. 여기서 ‘일(一)’은 나누어지기 이전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전체로서의 하나이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금강삼매경의 내용은 기신론의 일심을 체득하기 위한 체계적인 수행법을 제시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와 같이 원효는 기신론에 입각한 자신의 교학체계에 입각하여 그 의미를 새롭게 해석해 냄으로써 『금강삼매경론』을 공관사상에 그치지 않고 차별과 무차별을 초월한 진리의 본래 모습을 드러내는 사상을 제시한 경전으로 읽어 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서 금강삼매경의 내용은 일승과 삼승, 공관과 유식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원효는 기신론과 금강삼매경에 의거하여, 서로 대립하는 이론들은 진리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으로 이해하여 조화시킨 뒤, 불교의 근본 목적은 차별을 초월한 절대적 진리인 일심을 체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서로 대립되는 이론들이 실제로는 대립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 원효의 화쟁(和諍)사상은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나온 것이었다.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서 원효는 그 당시 불교학에서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이야기되는 개념들이 실상은 동일한 진리의 모습을 다른 차원에서 다른 방법에 의해 설명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진리의 참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언어의 개념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효의 사상은 신라의 불교계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영향을 주었으나, 그의 사상체계를 그대로 계승한 이들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한편, 신라의 불교가 교학 방면에서 발전한 것은 인쇄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불국사를 조성하면서 법당 앞에 세운 석가탑에 봉안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8세기 초엽 목판으로 인쇄된 경전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

3. 신라 후기의 불교계

8세기 중반 이후 신라사회는 커다란 변동을 겪게 되었다. 혜공왕대(765~779년) 후반에 귀족들의 모반이 연이어 일어나다가 국왕이 반란의 와중에 희생됨으로써 무열왕계의 왕통이 단절되고 중기 왕실은 막을 내렸다. 이후의 신라 후기 150년 동안은 귀족들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계속되어 20명의 왕이 즉위하고, 그 중 상당수가 피살당하는 혼란의 시기가 계속되었다. 왕권이 약화된 가운데 귀족들은 자신들의 세력 유지를 위하여 자의적인 수탈을 강화하였고, 이에 못 견딘 백성들은 도적이 되거나 민란을 일으켜 저항하게 되었다. 그 결과, 중앙정부의 영향력은 감소되었고 지방에서는 독자적인 정치세력들이 등장하여 중앙정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일기에 제시되었던 정치적 원리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이를 회복하기 위한 후기 왕실의 몇 차례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 채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어 갈 뿐이었다. 신라 후기의 사회적 격변 속에서 불교계도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었다. 통일기 이후 경주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교학불교는 점차 후퇴하고, 선종을 비롯한 실천적인 수행들이 지방을 무대로 하여 발전해 나갔다. 교학의 침체 불교계의 변화는 경덕왕대(742~764년)의 후반부터 나타났다. 그 이전까지 활발하게 진행되던 교학의 연구는 급속히 침체하기 시작했다. 경덕왕대에 원로로서 활동한 태현은 유식학, 화엄학, 기신론 등에 관해 많은 저술을 하였지만, 태현 이후에는 새로운 교학연구나 저작활동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에 실천적 수행을 중시하는 불교적 흐름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먼저 그 동안 부석사를 중심으로 실천적 신앙을 중시하고 있던 의상계의 문도들이 중앙 불교계에 등장하여 왕실과 귀족들의 존경과 숭배를 받게 되었다. 경덕왕대 초반까지도 의상의 문도들이 중앙에서 활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으며, 중앙에서 화엄학에 대한 이론화 작업을 주도하고 있던 원효와 가귀, 표원 등은 의상의 이론보다는 중국 화엄학자들의 저술과 기신론의 사상을 토대로 화엄사상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덕왕대에 들어와 의상계의 표훈이 국왕과 재상의 존경을 받으면서 불교계의 중심 인물로 등장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표훈은 국왕의 부탁을 받고 후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늘에 올라가 천제와 상의했다고 전한다. 재상 김대성(金大城)은 표훈의 강의를 들었다고 하는데, 왕실의 도움을 받아 김대성이 창건한 불국사와 석불사에는 표훈과 함께 같은 의상계인 신림이 초대 주지로 초청되었다. 『삼국유사』에서는 경덕왕대 중반에 태현과 화엄학승인 법해(法海)가 가뭄에 비를 청하는 법력을 겨루어 법해가 승리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태현으로 상징되는 중기의 교학불교가 쇠퇴하고, 그 대신에 의상계의 화엄학이 대두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이렇게 중앙에 등장한 의상계의 화엄학은 신라 후기에 교학불교의 중심적 위상을 차지하며 발전하였다. 신라 후기에 의상계의 화엄학이 크게 대두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 일본에 전해진 신라 불교학의 내용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의상계의 화엄학과 함께 경덕왕대 후반에 대두된 실천적 신앙으로 진표(眞表)의 미륵신앙이 있다. 진표는 벽골군(현재 김제군) 출신으로 12살 때 출가하여 금산사 순제(順濟) 법사로부터 점찰법을 배운 후에, 미륵으로부터 직접 점찰계법을 전수받기 위하여 변산의 불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간절한 참회수행을 시작하였다. 전기에 따르면, 간절히 수행한 끝에 미륵으로부터 점찰계본과 점찰간자 189개를 받았는데, 그 중에서 제8과 제9의 두 간자는 미륵의 손가락뼈로 만든 것이었다고 한다. 그 후에 진표는 산에서 내려와 미륵에게 받은 계법에 의거한 점찰법을 시행하여 많은 사람들을 교화시켰다. 진표 이후 영심을 비롯한 제자들은 점찰법을 계승하여 여러 지역에 사찰을 세우고 교화를 펼쳐나갔다. 그런데 진표가 직접 교화를 펼친 지역, 그리고 진표의 교화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지역은 대개 과거 고(古)신라의 외곽 지역으로서 수도인 경주에서 볼 때에는 주변 지역이었다. 진표의 불교 역시 당시 중앙의 불교에서 볼 때에는 세련되지 못한 원초적인 신앙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오히려 변경 지역에 그의 교화가 널리 퍼질 수 있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9세기 이후에 진표의 사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밝혀 주는 문헌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신라 말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미륵불을 자칭했던 것은 진표의 미륵신앙을 계승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선종의 수용과 전개 신라 후기의 불교계의 가장 큰 변화는 선종의 수용이었다. 선종은 8세기 이후에 중국에서 급속하게 발전하며 불교계의 중심사조로 등장하였는데, 중국에 유학한 승려들을 통해 이 새로운 사조가 신라에도 차츰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9세기 중엽에는 선을 배운 다수의 유학승들이 일시에 귀국하면서 선종은 신라 불교계에서도 주요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고 특히 새로 등장한 지방 정치세력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교학불교를 능가하는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신라에 선종이 처음 수용된 것은 8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에 유학했던 법랑(法朗)이 중국 선종의 제4조인 도신(道信, 583~654년)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호거산에서 선법을 전한 것이 그 최초이다. 법랑의 선법은 신행(神行, 또는 信行, 704~779년)에게 계승되었다. 신행은 법랑이 입적한 뒤에 중국 유학을 다녀왔다. 그는 제자들에게 선법을 전하면서 먼저 간심(看心)으로서 선을 닦게 한 후 근기가 익으면 방편(方便) 법문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북종선의 수행법과 일치한다. 법랑과 신행에 의해 전래된 선법은 신수계통의 북종선으로 후대 중국 선종의 주류가 된 남종선 이전의 선사상이었다. 후대에 중국에서 남종이 선종의 주류로 확립되자 북종선은 급속하게 쇠퇴하였다. 신라에 남종선을 처음으로 전한 사람은 40여 년의 중국 유학을 마치고 헌덕왕 13년(821)에 귀국한 도의(道義)였다. 도의는 북한군(北漢郡, 현재 서울) 출신으로 선덕왕 5년(783)에 중국으로 유학하여 여러 지역을 다니다 강서성 홍주에서 마조의 제자인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서당에게 “진실로 법을 전할 만하다면 이런 사람이 아니고 누구에게 전하랴” 하는 말을 들으며 법맥을 전수받았다. 당시 백장선사는 “강서의 선맥이 몽땅 동국(東國)으로 가는구나”라고 극찬을 하였다고 전한다. 821년 법맥을 전수받고 귀국한 도의는 선풍을 널리 펴고자 하였으나 당시 신라는 교학 중심이라 선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당시의 불교계에서는 경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교외별전, 견성성불을 주장하는 선풍을 이해하지 못하여 도의를 배척하였다. 결국 도의는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하고 후일을 내다보며 스스로 수행하면서 소수의 제자들에게 선을 전수하여야 했다. 오늘날 도의국사는 우리나라 선법을 가장 먼저 전수한 분으로 평가되어 한국불교의 대표 종단인 조계종의 종조(宗祖)로 추존되었다. 이처럼 초기의 선종은 아직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졌고, 때로는 기존 불교계로부터 배척당하여 널리 전파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830년대 이후 중국에서 남종선을 수학한 다수의 승려들이 귀국하여 선법을 선양하면서 상황은 크게 변하였다. 중국 불교계에서 선종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것이 알려지고 선종에 대한 이해가 점차 확대되면서 선종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선사들의 교화력이 증대되면서 중앙과 지방의 정치세력들도 이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선사들의 활동 모습을 통하여 선종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도의와 마찬가지로 서당 지장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홍척(洪陟)은 흥덕왕대(826~836년) 초기에 귀국하여 지리산에서 선법을 펼쳤다. 명성이 알려져 왕실에 초청되기도 하였던 홍척은 국왕 부자의 귀의를 받았으며, 왕실의 도움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선찰이 되는 실상사를 창건하고 많은 제자들을 교화하였다. 금마(金馬) 출신의 가난한 상인이었던 혜소(惠昭, 774~850년)는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로 들어가는 사행선의 뱃사공으로 중국에 들어간 후 창주 신감(滄州神鑑)의 문하에서 출가, 수학하였다.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처음에는 상주의 장백사에서 교화를 펼쳤는데 점차 대중들이 많아지자 지리산 화개곡으로 옮겼고, 만년에는 보다 넓은 장소를 구하여 화개곡 근처에 옥천사(현재의 쌍계사)를 창건했다. 왕실에서도 그의 교화에 주목하여 경주 황룡사의 승적에 올려 주고 우대했다. 혜철(慧徹, 785~861년)은 삭주(현재의 춘천) 출신으로 부석사에서 화엄학을 공부한 후 헌덕왕 6년(814) 중국에 들어가 서당 지장에게서 선법을 수학하였다. 신무왕 1년(849)에 귀국하여 곡성 태안사에서 교화를 펼쳐 명성을 얻었고 왕실의 귀의를 받았다. 절중(折中, 826~900년)은 휴암군(황해도 봉산) 출신으로 처음에 부석사에서 화엄학을 공부하다가 도윤을 만나 선으로 전향하였다. 전란을 피하여 영월의 사자산에 주석하여 천여 명의 제자를 두었고 왕실의 존경과 숭배를 받았다. 웅진(공주 지역) 출신의 체징(體澄, 804~880년)은 설악산에서 도의의 제자인 염거(廉居)에게 수학한 후 희강왕 2년(837)에 동료들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자신이 배웠던 선법이 중국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곧바로 귀국하여 장흥의 가지산 보림사에서 도의의 선풍을 선양하였는데, 이를 가지산문이라 불렀다. 왕실의 후원을 받았던 그의 문도는 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 가지산문의 선맥은 고려 말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에게도 이어졌다. 이상에서 보듯 830년에서 840년대에 걸쳐 중국에서 돌아온 선승들은 여러 지역에 산문을 개창하여 적극적인 교화를 펼쳤고, 그 흐름은 제자들에게 이어져 계속 발전해 갔다. 또한 이들 이외에도 지력문(智力聞), 신흥언(新興彦), 용암체(涌岩體), 진구휴(珍丘休), 보리종(菩提宗) 등으로 알려진 선승들도 같은 시기에 각기 산문을 개창하고 선풍을 떨쳤다고 한다. 짧은 기간에 이처럼 많은 선승들이 여러 지역에서 선법을 펼침으로써 선종은 이제 신라 불교계에 확실하게 정착되어 갔다. 불과 얼마 전에 도의가 기존 불교계에 의해 배척되어 설악산으로 은거하였던 것에 비교하면 단기간에 불교계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기간에 활동한 선승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마조 문하의 제자들로부터 선법을 수학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그 후 한국의 선사상은 마조의 선에 토대를 두고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선종이 단기간에 널리 확대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선사들의 이러한 사상적 동질성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풍수지리설의 유입 선종의 수용과 함께 새로운 문화사조들도 수용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풍수지리설이다. 수도를 정할 때라든지 대형 건물을 세울 때에 주변의 산세와 하천의 방향을 고려하는 등의 풍수적 관념은 이미 삼국시대 초기에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중국의 풍수지리 이론을 덧붙여서 체계적인 풍수지리설이 확립되고 그것이 사회 전반에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선종의 수용이 본격화되던 9세기 중반 이후였다. 그리고 그러한 체계적인 풍수지리설을 처음 제시한 사람은 선승이었던 도선(道詵, 827~898년)이라고 전한다. 일반적으로 도선이 직접 중국에 유학하여 선과 풍수지리의 이론을 배워 온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지만, 고려 의종 4년(1150)에 편찬된 도선의 비문에는 도선은 본래 혜철이 동리산에서 선법을 펼칠 때에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후 어느 신비한 사람으로부터 풍수지리에 대한 이론을 배웠다고 한다. 도선은 광양의 옥룡사에 산문을 세우고 선을 교화하면서 동시에 세속 사회에 풍수지리의 이론을 전하였는데, 특히 개경지역을 방문하여 왕건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것을 예언하였다. 도선의 행적과 관련해서는 신비적인 이야기들이 적지 않아서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풍수지리설의 전개에 선승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은 당시의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도선의 비문에서 그에게 풍수지리를 가르친 사람은 그 이전에 중국에 유학하여 풍수지리를 배웠을 터이고, 도선은 이러한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을 것이다. 선승들이 풍수지리설을 전개한 것은 이들이 중국에 유학하는 과정에서 당시 발전하고 있던 풍수지리의 이론에 접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중국과 신라에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수행하는 과정에서 지리에 대한 지식을 몸에 익히고 이를 이론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도선이 전개한 풍수지리설은 풍수이론을 불교적으로 재구성한 것으로서 지리적 결함을 사찰이나 탑을 건립하여 보완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이다. 풍수지리 이론에 의할 때 사찰은 단순히 불교신앙의 터전일 뿐 아니라 국토의 안정을 보장하는 기능까지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단순히 지형의 우열을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토지의 균형적 이용을 가능하게 하는 이론으로서 새롭게 등장한 지방 세력가들이 자신들의 지역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이론으로도 활용되었다. 왕건의 왕조 개창 과정에서 보듯이, 지역의 지리적 결점을 합리적으로 보완하면 오히려 지역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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