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역사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역사적 배경

관리자 | 2006.03.14 05:02 | 조회 2003
인도불교는 기원전 1세기경에 간다라지역을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국의 서부지역에 유입되었다. 중국 땅에 들어온 불교는 중국 고유의 사상과 결합하여 고도의 불교문화를 형성, 발전함으로써 동양 문화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보리 달마가 전수하여 중국에서 꽃 피운 선종은 인류 문화사에서도 유래가 없을 만큼 위대한 결실을 맺었으며, 우리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대승불교불상

역사적 배경

한(漢)나라가 오늘날 ‘중국 본토’라 불리는 거의 전 지역을 통치하면서, 동시에 실크로드 주변의 오아시스 왕국들에 대해 일종의 군사적 섭정을 실시하고 있을 때, 다른 한쪽에서는 인도 스키타이 종족인 월지족(月支族)이 소그디아나(Sogdiana)로부터 북인도와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서부의 광활한 지역에 대하여 지배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중앙아시아는 이와 같이 양쪽의 지배와 문화적 영향에 노출되어 있었고, 실크로드의 두 갈래 길을 따라 번성한 소왕국들, 예를 들어 북로의 카쉬가르, 쿠차, 투르판과 남로의 코탄은 중국과 인도의 문화가 뒤섞인 혼성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가고 있었다. 불교는 쿠샤나(Kusa-na) 제국과 더 서쪽으로 나아가서는 파르티아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수되었는데, 그 주역들은 무역로의 대상(隊商)들과 합류한 승려들과 불교경전에 정통한 재가 신도들이었다. 중앙아시아 전역에서는 커다란 장애에 봉착함이 없이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불교가 널리 퍼져 나갔는데, 이는 국가들이 작았고 그 지리적 위치 때문에 외국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가 중국 서쪽 끝에 있는 ‘옥문관(玉門關)’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게 되자 양상은 크게 달라졌다. 한나라의 문명은 수 세기를 거치면서 형성해 온 매우 명확히 규정된 정치적ㆍ사회적이념과 규범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문화적 동질감과 우월감을 강하게 구축한 교육받은 지식층이 통치하고 있던 한나라는 정치와 사회에 있어서 총체적 질서라는 이상을 바탕에 깔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 해탈이라는 교의가 스며들 여지가 거의 없었다. 더구나 그 교의가 ‘이방인’에게서 비롯된 경우라면, 더욱더 스며들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사회와 정치가 사상적으로 결합된 중국의 지배적 전통과 불교 사이의 긴장은 중국의 불교사 전체에 있어서 지속적이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220년에 한나라가 멸망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최소한 150년 동안은 그다지 영향력을 갖지 못하던 불교가, 중국 땅의 대부분이 와해되고 이방의 왕조들에 의해 통치되던 분열의 시대(311~589년)에 이르자 강력한 종교운동으로서 발전하고 성장을 이루었던 것은 분명히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중국 땅에서의 공식적인 이념은 바로 그 성격 자체가 제국적 통일과 우주적 권력이라는 이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이상 실현에 실패하게 되자, 정치적 혼돈과 다(多)중심주의를 배경으로 하여 불교는 힘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589년에 제국이 재통일되자, 중국불교는 정신적,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완전히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는 국면을 맞이하였다. 불교교단은 수(隋) 왕조와 당(唐) 왕조시대(589~906년)의 통치자들이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분열되어 있을 당시에도 전통적인 정치이념을 이루는 기본적 이상과 규범들, 그리고 이들로부터 유래하는 도덕원리들이 교육받은 지식층의 대다수에 의해서 생생히 고수되고 있었다. 유교의 이상세계는 매우 뿌리가 깊고 보편적으로 인정된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즉 인간 세상은 천상과 지상이 공존하는 하나의 유기적 전체를 형성하는데, ‘하늘의 명령’에 의해 그 직을 수여받은 통치자는 자신의 제의적(祭儀的), 윤리적, 행정적 의무를 완전히 수행함으로써 우주의 평형상태를 유지할 책임을 지닌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국정부의 권위는 원리상 무한하다. 또 그것은 사회 전체와, 필요하다면 그의 시민 전체의 개인생활도 포용한다. 그리고 이상적인 사회는 두 계층으로 이루어진다. 생산을 담당하는 다수의 인민과, 이들을 온정으로 대하면서도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다스리는 ‘학자 관료’인 지식층이다. 이 지식층에게는 그들의 윤리적 자질과 학문적 성취 때문에 일체의 권력과 특권과 보다 높은 문화를 독점할 자격이 주어져 있다. 기본이 되는 가치는 안정, 계층적 질서,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조화, 그리고 행위의 의례를 근면하게 준수하는 것인데, 이러한 가치들을 도덕교육에 의해서, 또는 필요하다면 강압에 의해서라도 가르쳐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불교는 그 자체의 성격상 이러한 지배적 이념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전통적인 세계관은 유신론적인 성향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실용적이고 세속적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이상은 이 세상에서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며, 교의는 그 형이상학적인 질에 대해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질적인 적용력과 사회ㆍ정치적인 효력에 따라 평가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또한 중국의 종교적, 철학적 사고에 있어서 유교가 아닌 고유한 전통인 도교를 앞세운다. 예를 들어, 육신의 불멸성을 획득한다거나 자연의 구체적인 힘과 조화를 이룬다는 실질적인 목표를 보다 개인주의적인 방식으로 지향했던 도교의 전통을 강조하는 것이다. 대중적 종교는 이러한 일반적인 태도를 공유하고 있었다. 신성시 되는 조상의 땅에 대해 그 지역의 지신(地神)을 받들어 모신 제사가 그러했듯이, 조상에 대한 제사는 자연스럽게 가족과 씨족을 통합했다. 모든 존재에 대한 불교의 거부, 특히 모든 현상이 완전히 비실재임을 주장하는 대승의 교의는 일종의 병적인 허무주의적인 것으로 쉽게 간주되었으며, 어둠과 죽음의 원리인 음(陰)과 동일시 되었다. 업, 윤회, 개인 해탈과 같은 관념들이 인도에서는 종교문화의 일부로서 보편적으로 인정되었지만, 중국에서는 이것들이 잘 정돈된 중국인의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좀처럼 양립할 수 없는 기묘하고 색다른 것이 되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불교는 깨달음, 열반, 성불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이치를 목표로 삼아 추구해 들어갔지만, 추상적이고 비실질적인 성격 때문에 유교권에서는 쉽사리 승인을 받을 수 없었다.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그 긴장이 한층 더 두드러졌다. 불교는 그 시초부터 확고하게 사원생활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다. 사원생활은 일체의 사회적 굴레와 의무, 특히 가정생활과 관련된 것들을 거부하므로, 불교는 중국인들이 고수하는 사회윤리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와 상충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인의 사회윤리에 의하면, 인간으로서의 첫째 의무는 자식으로서의 효도에 있었고, 가문의 대를 이을 자식을 낳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생산적인 노동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따라서 거지나 부랑자를 사회적 기생충이라 보았다는 점에서, 중국의 전통적 체계는 성직자의 사회라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거의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농사짓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았던 성직사회의 구성원들은 그들 삶의 일부를 방랑으로 보내야 했으므로 음식을 얻어먹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교단은 출세간적인 조직으로서 세속의 권력이 부가한 의무, 즉 부역과 세금의 의무 등에 구애받지 않았다. 군역을 면제받고 정부의 감독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은 정부의 권위는 원칙적으로 모든 것을 내포한다고 믿고 있던 중국인의 사고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결과를 낳았다. 중국인의 고유 이념과 불교 사이의 이러한 긴장이 결국 불안정한 공존의 상황을 이끌었다. 여기서 불교는 정해진 한계 내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도록 허락되었다. 불교는 중국문화의 보조물로서 당국에 의해 인정받았다. 자국의 문화에 유익하고, 어쩌면 자국의 문화를 돋보이게 할 수도 있다는 입장에서 유교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가르침을 형이상학적으로 완성시킨다는 것이었다. 결국 불교는 왕조와 국가와 사회를 주술적으로 보호하는 가치로서 인정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러한 긴장은 과격한 박해의 양상으로 표면화되었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초기에 불교가 절정에 이르렀던 당시에도, 결국 불교국이 되었던 타이나 미얀마의 경우와는 달리, 중국은 결코 ‘불교국’이 되지 않았다. 불교는 언제나 중국인에게 있어서 중심이 되는 전통의 그늘 속에서 발전해야만 했다. 하지만 완전히 적대적인 환경이었다면, 불교가 중국에 있는 주요 종교들 중의 하나로서도 발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앞서 말한 긴장과 투쟁의 영역과는 달리, 중국문명은 불교의 영향에 그 자신을 보다 쉽게 내맡기는 여러 가지 요소를 간직하고 있기도 했다. 중국불교는 오히려 수렴과 혼합이라는 극히 복잡한 과정의 결과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는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서 불교적 요소들이 중국적인 관념과 실천과 제도와 접목되고 융합되었다. 그리고 중국불교가 독특한 창조성을 지니게 된 주요한 원천도 그러한 복합적 성격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자면, 사원생활의 이상과 중국인의 은둔주의, 불교의 명상과 도교에서 말하는 자연과의 합일, 회향(廻向)에 대한 대승의 믿음과 중국인의 조상에 대한 제례의식, 불교에 있어서 재가 신도의 집회와 중국에 있어서 전통적인 농민의 조합, 밀교적 의식과 도교의 주술 등 수많은 요소들이 서로 끊이지 않고 다양하게 결합함으로써 중국불교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중국불교의 성격을 결정짓는 또 다른 요인은 지리적 상황이었다. 3세기 이후 불교는 남쪽의 해상 통로를 거쳐서도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인도의 탐랄립티(Ta-mralipti)에서 스리랑카를 거쳐 인도차이나를 지나 중국의 광동(廣東)에 이르는 해상로는 다시 육로로 장사(長沙)에 이르거나, 해안을 따라 양자강의 하류에 이른다. 그러나 이 통로를 통한 불교와 중국문화의 접촉은 경전과 불상을 지니고서 실크로드를 거쳐 끊임없이 흘러들어 온 전법사의 유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했다. 실크로드는 중국의 북부를 오늘날의 신강성의 밖에 있는 카쉬카르, 쿠차, 투르판, 코탄 등과 같은 불교의 중심지와 연결해 주었고, 보다 멀리 인도의 북서지방과 소그디아나지역을 이어 주었다. 이러한 지리적 상황은 중국불교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끼쳤는데, 한족(漢族) 출신이 아닌 왕조가 중국 북부의 전 지역을 지배하고 있을 때 그 영향이 특히 심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중국불교의 전형적인 지역화를 초래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북중국을 장악한 비(非)한족 출신의 통치자들은 쉽게 개종하였고, 그러한 왕조들의 지배 아래서는 왕실과 승려들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유지되었다. 또한 불교경전에 대한 많은 번역이 이루어진 곳도 북방이었다. 이 시기에 중국의 남반부는 한족의 왕조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여기서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영향은 간접적으로만 미쳐 훨씬 더 중국화된 불교가 발전하였고, 고유한 종교적 철학적 전통에 근거하여 불교를 해석하는 데에 보다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불교의 또 다른 특징 하나는, 인도불교의 다양한 부파와 대승운동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2세기에는 공(空)의 교의를 담은 『대지도론(大智度論)』, 400년 무렵에는 중관학(中觀學), 600년 무렵에는 유식학(唯識學), 8세기에는 밀교 등이 파도처럼 아시아 대륙으로 밀려 들어와 결국에는 중국불교 속으로 흡수되었다. 이러한 흡수의 과정이 마침내 중국의 불교인들 자신에게는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였다. 그들은 가장 다양하면서도 간혹은 투쟁적이기도 한 관념과 실천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불교는 한 지역으로부터 중국에 전래된 것이 아니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마르칸드와 인도의 날란다처럼 전파의 중심지가 매우 많았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불교 내의 다양성은 심화되었다. 이렇게 계속 성장한 교의적 다양성이 중국불교의 한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교판(敎判)’으로 조화하고 통합하고자 시도하였는데, 교판이란 붓다가 설한 가르침을 ‘시기와 수준’으로 구별하여 모든 것을 포용하는 체계를 말한다. 이러한 학구적인 연구 방식과 함께, 모든 불전의 전통을 근본적으로 뛰어넘어 곧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선종(禪宗)은 중국불교의 가장 큰 성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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