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역사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불교의 전래

관리자 | 2006.03.14 05:02 | 조회 2336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계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중에서도, 한나라의 명제(明帝, 58~75년 재위)와 관련된 설화가 가장 널리 전해져 오고 있다. 어느 날 명제가 꿈 속에서 금인(金人)의 모습을 한 성인을 만났다. 명제는 그 사람이 붓다라고 불리는 외국의 신(神)임이 틀림없다는 말을 듣고서 인도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몇 년이 지나서 그 특사는 한 사람(일설에서는 두 사람)의 인도인 승려를 대동하고서 한 필의 백마와 『사십이장경』을 가지고 돌아왔다. 황제는 이들을 극진히 환대하고 수도인 낙양 근처에 백마사(白馬寺)를 건립하였다. 하지만 여러 학자들은 불교가 이 설화에서처럼 인도로부터 직접 중국으로 전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직접 전해진 것이 아니라, 쿠샤나 제국과 파르티아, 중앙아시아 등지로부터 전래되었으며, 실크로드의 동쪽을 계속 거쳐 오면서 점차 여과되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앞의 전설에는 역사적 증거를 통해 확신할 만한 약간의 정보를 내포하고 있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불교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서 신뢰할 만한 최초의 것은 서기 65년에 황태자가 취한 불교신앙에 대한 법령이다. 이 기록은 1세기 중엽의 중국에는 불교식의 어떤 의식(儀式)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며, 더욱이 명제 치하에서 황실의 일부에서는 불교를 알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사십이장경』이 알려진 것은 오로지 후대의 개정판 덕분이지만, 그 내용의 일부를 통해서 원래의 판본은 매우 오래된 것이며, 그 연대도 아마 명제의 시대와 같은 시기였을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백마사 건물은 훨씬 후대에 건립된 것이기는 하지만, 중국에서는 아직까지도 불교의 요람으로서 방문객들에게 안내되고 있으며, 적어도 3세기의 문헌에서는 그 존재가 언급되고 있다. 서기 65년 황태자의 불교활동을 다루는 부분 이외에도 후한(後漢)시대의 사서(史書)에서는 한나라 황실과 관련된 불교에 대해서는 종종 산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 언급들은 모두 성스러운 존재로서의 붓다에 대한 의식이 종교적인 도교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도교에서는 육신을 불멸하게 한다는 도술(道術)을 연구하고 실천하며, 그러한 불멸성을 획득하여 이제는 자신들이 거주하는 천국과 같은 장소에서 신자들의 운명을 인도한다고 믿어지는 어떤 신적 존재들에 대해서 의식을 행하는데, 이러한 점들이 불교와 유사하다고 본 것이다. 도교는 영감을 너무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의존하는 다양한 의식은 도교의 외래적 변형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몇 가지 흥미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그러한 결론을 확신하게 한다. 한나라의 부조물에는 불상이 엄니를 가진 코끼리에 둘러싸여 있는 장면이 있다. 코끼리는 붓다의 전기에 등장하는 동물로서 불교예술에서는 매우 대중화된 소재이다. 그런데 이들 속에는 중국의 신화에서 유래하는 다른 초자연적 생물들도 있다. 불교의 몇몇 관념들이 중국에 맨 처음 출현하게 된 데에는 도교의 종교적 입장이 매개체로서 작용하였다. 관념과 실천에 있어서 불교와 도교 사이에는 표면상 많은 유사점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결합이 결코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일찍이 성립된 불교문헌들은 불교의 관념을 표현하는 경우에 흔히 도교의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불교에 대한 오해를 깊게 할 뿐이었다. 때로는 두 종교의 창시자가 동일인이라고 볼 정도로 혼동되기도 하였다. 한나라 때의 문헌에서는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이라는 이론을 최초로 언급하고 있다. 그 내용은 노자가 서역으로 떠나서 인도 노예들의 낮은 지적 수준을 채택하여 그 자신이 만든 원래의 교의로 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스스로 붓다의 모습으로 그들 사이에 화현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화는 두 종교 사이에 닮아 보이는 것을 설명하려던 의도에서 비롯되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이론은 불교적 요소를 도교에 편입시키는 것을 정당화하였고, 또 ‘외국에 있는 도교의 지파’로서 불교를 중국에 전파하는 것을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몇 세기가 지나서 불교와 도교가 서로 경쟁 상대가 되자, 이 이론은 불교의 전파를 반대하는 근본 쟁점들 중의 하나가 되는 가운데, 노자가 서역에서 화현했다는 설화는 계속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대립은 천년 이상 지속되었고, 결국 13세기에 불교 측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불교의 확대는 대규모의 번역활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번역 작업에서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다. 불교의 무수한 전문어에 상당하는 중국어를 새로 조성해 내야 했고, 또는 중국의 전통적 종교, 주로 도교의 용어로부터 차용해야 했다. 외국의 전법사들은 중국어에 거의 익숙하지 못했고, 산스크리트어나 인도의 방언인 프라크리트어를 아는 중국인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직접적인 번역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역경원’을 구성하여 해결했다. 원어에 정통한 외국의 승려가 문헌을 암송하거나 저술하면, 대개 2개 국어를 사용하는 해석가의 도움으로 1차 번역이 완성되는데, 이것을 나중에 중국인 보조원이 다듬고 교정하여 한자로 기록하여 나갔다. 4세기 말엽까지는 외국의 전법사와 그 제자들에 의해 집단작업이 유지되고 있었으며, 전법사의 작업을 돕는 제자들은 승려와 속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불교가 황실과 고급 관료의 후원을 받게 된 5세기 초엽부터는 간혹 12명의 인원이 참여하는 대규모의 번역이 활성화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수세대에 걸쳐 대를 이어 번역활동에 노력하는 사람들이 등장함으로써 불교 번역가라는 특수한 부류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말하자면 중국인들로 구성된 단순 문필가였다. 이들의 번역에는 최초의 판본을 특징짓는 도교의 어휘들을 그대로 차용하는 등, 통속적인 요소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초기 판본의 그러한 어휘들은 점차 보다 정확하고 새롭게 바뀌어 갔다. 수천에 이르는 불교경전과 논서들이 이런 식으로 번역되었고 종종 재번역되기도 했다. 이미 730년에는 그 수가 2,000종 이상의 문헌들로 증가하였으며, 이들 중의 일부는 네 차례 또는 다섯 차례나 연이어 번역되었다. 후한시대에 ‘낙양(洛陽)의 교단’에서 번역을 위해 선택한 문헌의 범위는 보다 한정되어 있었다. 많은 주의를 쏟았던 것은 선정(禪定)을 다루는 짤막한 문헌들이었다. 정신수행에 대한 고대의 불교적 체계는 명상과 호흡 조절에 있어서 도교의 정신적 육체적 기술과 외형상 뭔가 닮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대승경전에 대한 최초의 한역본도 있었다. 즉 여러 부처들과 보살들의 장엄함과 구제력을 다루는 신앙적 문헌들, 공(空)의 교의나 모든 현상의 보편적 비실재성을 설하는 경전들이었다. 이 중 후자는 후대에 꽃피울 중국불교의 철학에 무한한 영향을 끼치게 될 교의를 담고 있었다. 중국 땅에 형성된 초기불교교단의 실제 조직과 사회적 구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낙양 교단’의 존재를 알리는 유일한 유물이 봉헌 비명(碑銘)으로서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데, 중국어가 아닌 중부 인도의 방언으로 새겨져 있다. 3세기 중엽 이전에는 율장(律藏)에 대한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가장 근본적인 계율들은 구전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국면은 중국불교의 특징을 유지하게 될 교의를 전파하는 데 있어서 재가 신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한나라시대의 불교는 거의 같은 시기에 로마제국에 널리 퍼져 있던 동방화된 종교들과 비교할 수 있는데, 그 교의상 다소 외래적이고 이질적인 종류의 문화였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몰아닥친 소요와 군벌주의로 인해 말세적 감정과 불확실성이 뒤섞여 있던 후한시대에 와서는 불교가 상당히 매력적인 종교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불교가 강조한 것이 모든 사물이 무상하고, 모든 존재가 헛것이며, 온갖 위험과 슬픔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삶은 덧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로써 정신적 수행과 정화를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제례의 의무를 중시하는 유교와 기괴한 술법을 중시하는 도교의 종교적 입장과 비교할 때, 불교가 제시하는 방법은 비교적 단순했고, 불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강력하고 자애로운 초자연적 존재에 의해 자신이 보호된다고 믿었다. 아울러 승려들은 독신생활을 고수하면서 자신의 정신활동을 조절하고 점차 모든 형태의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 요가와 같이 명상이나 정신집중의 기술을 실수(實修)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수 세기 동안 중국의 불교적 종교생활의 기본 내용을 이루어 왔다. 교단 전반의 조직이 안정되고 포교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말엽으로, 이 때가 되어서야 불교는 중국사회의 교양 있는 상위계급 속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정치적 상황은 극적으로 전개되어 갔다. 몇십 년 동안 지속된 혼돈과 내란으로 서기 220년 한나라는 결국 멸망하였다. 이어서 약 50년 동안 세 지역을 각각 거점으로 하여 경쟁하고 있던 정치권력들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이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를 삼국시대라 한다. 서진(西晋, 265~316년)에 의해 중국은 재통일되었지만, 이 기간은 짧았고 불안정했다. 하지만 불교의 입장에서 이러한 상황은 다행이었다. 정치적 다중심주의가 불교의 전파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한나라시대의 불교는 중국의 북부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이제 불교는 다른 지역으로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오늘날 남경(南京), 소주(蘇州), 항주(杭州)를 잇는 양자강 하류의 비옥하고 인구가 조밀한 삼각지까지 퍼져 나갔다. 북부에서의 불교 전파와 사원 건립은 주로 다르마라크샤(Dharmaraks톋, 竺法蘭)의 활약 덕분이었다. 위대한 번역가요, 전법사인 그는 돈황에서 온 중국화된 인도 스키타이인이었는데, 제자들의 도움으로 3세기 후반에 대규모로 대중을 개종시켰다고 한다. 이 시대에는 이제까지 언급해 온 지리적 특수화의 전형적인 양상이 등장함을 엿볼 수 있다. 즉 북부와 남부의 대조적인 양상이다. 황하를 젖줄로 하여 고대로부터 중국문명의 중심지가 된 북부는 평원과 황토에 자리잡고 나름대로의 불교유형을 형성하였다. 남부 역시 양자강의 중류와 하류를 따라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발전하여 독자적인 불교유형을 형성하였다. 특히 남부는 3세기가 되어서야 겨우 처음으로 개발의 국면에 들어선 광대한 지역으로, 중국의 역사에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풍부한 유산을 창출하는 역할을 하였다. 북부에서 불교는 중앙아시아와 그 너머의 지역으로부터 밀려온 신선한 충격에 의해 계속 양분과 자극을 받고 있었다. 대륙을 곧게 뚫은 통로를 따라 동쪽으로 확장하면서 불교의 주요 공동체들이 성장하였다. 서쪽으로 돈황(敦煌)으로부터 동쪽의 낙양과 산동(山東)을 잇는 것이 그 주요 통로였다. 온갖 정치적 소요에도 불구하고 무역과 교통은 지속되었고, 북부의 대도시들이 외국 상인들의 중요한 거점을 구축하였다. 260년경, 불교의 경전을 구하고자 서역으로 가는 중국인 순례자가 처음으로 등장하였다는 사실 역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러한 여행의 선구자는 코탄으로 갔던 주자행(朱子行)이었다. 그는 후대에 5세기의 법현(法顯)이나 7세기의 현장(玄斡)과 같은 뛰어난 순례자들이 훨씬 더 광대한 탐험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번역활동이 대규모로 추진되었던 곳도 역시 북부였다. 다르마라크샤는 혼자서 약 150여 종의 한역경전을 완성했다고 전해지는데, 그 중의 일부는 대승의 가장 중요한 고전이다. 무엇보다도 중대한 사실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 최초로 완역된 일이다. 법화경은 모든 신자에게 성불의 길을 개방한 ‘일불승(一佛乘)’의 교의를 담고서 붓다의 영원성과 전지성을 강조하며 상징과 비유를 매우 풍부하게 싣고 있는데, 이는 곧 중국불교에서 단연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공경받는 경전이 되었다. 다른 모든 대승의 교의를 초월한다고 주장하는 특별한 계시로서 그것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6세기에 성립된 천태종(天台宗)에서 최종적으로 표명되었다. 천태종에서는 법화경을 법(法)의 궁극적인 성취라고 간주하여, 그들의 오시(五時) 교판 중 진리의 가장 완성된 위치인 다섯 번째에 두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북부에서 승려들의 공동체가 성장하였음을 알려주는 또 다른 증거는 3세기 중엽에 계율의 논서에 대한 한역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분명히 그 시기에 이르러서는 사원생활을 위해 보다 더 신빙성이 있고 세세한 규율의 규범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양자강 하류지역에서는 상황이 아주 달랐다. 거기에는 중앙아시아와 접촉한 징후가 전혀 없고, 사원 중심의 불교에 대한 강조가 훨씬 약하다. 실제 남부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번역가로서 지겸(支謙)은 중국에 귀화한 인도 스키타이 출신의 재가 신도였다. 그가 완성한 많은 문헌들은 정확성보다는 문학적 우아함과 가독성(可讀性)을 추구한 세련된 번역이었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중국불교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던 두 경전을 고르자면, 바로 아미타경과 유마경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아미타바(Amita-bha)라고 하는 아미타는 서방의 극락에 있다고 하는 자비의 부처이다. 후대 중국에서는 이 서방의 극락을 정토(淨土)라고 하며, 성심 성의를 다하여 아미타를 염원하고 그 성스러운 이름을 반복하여 부르는 모든 신자들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었다. 재가 신도에게 각별한 호소력을 지닌 또 다른 근본 경전은 유마경이었다. 이는 대승경전의 대표적인 걸작으로서, 너무나 대중화되어 일곱 차례나 한역되었다. 이 경전에서의 중심 인물은 신심이 돈독하고 부유한 재가 신도이다. 그는 초월의 경지요, 공(空)인 모든 현상을 꿰뚫어 보는 깊은 통찰력 때문에 일련의 형이상학적 논쟁에서 가장 뛰어난 성자들까지도 이길 수 있었다. 4세기부터 이 경전은 교양 있는 속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매력을 끌었던 점은 이 경전에 나타난 주인공의 성격과 신분이었고 철학적 논쟁의 깊이와 높은 문학적 기품이었다. 북부와 남부의 불교 사이에 나타나는 대조는 남부의 불교가 제국의 최남단과 접촉한 데에서 기인한다. 이 최남단은 오늘날의 베트남에 속하는 하노이이다. 베트남의 북방지역은 기원전 111년에 한나라에 편입되었다. 이로부터 약 1,000년 동안 이 지역은 중국인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과 베트남인으로 혼성된 귀족지식층이 등장하였고, 철저히 중국화되어 갔다. 한나라가 멸망한 후 이 지역은 이론적으로는 그 최남단에 위치한 제후국이었지만, 중세 초기에 이르러 중국인 통치자는 멀리 떨어진 수도로부터 실질상의 독립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인 이주자들의 끊임없는 유입으로 중국화의 과정은 촉진되었는데, 이들은 중국 본토에 소요가 계속되던 시기에 새로운 길을 찾아 조용하고 반식민지인 이 지역으로 몰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인이 거주한 중국 영토는 오늘날의 다낭 너머로까지는 확장되지 않았다. 현재의 베트남의 남반부에서는 인도화된 두 개의 국가가 흥기하였다. 하나는 푸난 왕국이었는데, 이는 메콩 강의 삼각주와 오늘날 캄푸치아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다른 하나는 참파 왕국으로 인도차이나의 남동지역을 지배했다. 이처럼 베트남에서 메콩 강의 분지는 중국문명과 인도문명의 중심지가 접하는 중간 지역이었다. 중국불교 초기의 것으로서 가장 흥미 있는 문서들 중의 하나가 발견된 것도 이 지역에서였다. 달리 자세한 인적 사항은 전해지지 않고 단지 어떤 스승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쓴 논서인데, 여기서 그는 전통을 고수하는 반대자의 공격에 대해 불교를 방어한다. 이 책은 유교권에 있었던 불교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과 그렇게 상투적인 반불교적 주장들이 완강했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유교권의 완강한 태도는 이후 몇 세기에 걸쳐 쏟아진 많은 양의 반박서와 변론서를 통해서 계속 반복된다. 반불교적 논쟁은 주로 승려직에 대한 반대로, 사원제도를 고수하는 불교의 성격과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불교의 종교적 믿음을 공격하기도 하는데, 불교는 극락과 지옥을 보답으로 약속함으로써 순박한 대중을 미신으로 이끌고 호도하는 ‘이단’이라고 낙인을 찍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그러한 교의적 배려는 드문 경우에만 주요한 역할을 해왔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불교와 유교 사이의 쟁론을 담은 논서는 앞에서 설명한 근본적인 긴장을 반영한다. 불교의 성직에 대한 견해와 관심, 그리고 속세의 권위에 대한 견해와 관심의 양자 사이에 빚어진 이념적 대립이다. 포괄적으로 말해서 승려에 대해 반대하는 논쟁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윤리적ㆍ공리적ㆍ정치, 경제적 측면이다. 윤리적 주장은 사원생활이 가정의 의무를 거부함으로써 사회적 행위라는 신성한 규범을 부자연스럽게 위반하는 것이라는 점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공리적 견지에서는 승려의 생활이 비생산적이며 공동체에 무익하다고 비난하며, 평민들이 저마다 밭을 일구지 않고 천을 짜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릴 것이라고 한다. 끝으로 자치적 구조를 형성한다는 교단의 주장은 정치적으로 용납할 수 없으며, 또 사원은 범죄를 저지른 반사회적 분자들의 피난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한편 승려들의 재정적 특권과 재산은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침식했다고 주장한다. 교단의 존립권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그들의 이러한 비난은 근본적이고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불교 측에서는 승려든지 속인이든지 이에 대해 대응책을 강구하고 반박을 제기할 절박한 필요성을 느꼈다. 이 경우 윤리적 문제가 가장 곤란한 점이었을 것이다. 승려는 교단에 합류함으로써 자기 가족과 완전히 끈을 끊을 수밖에 없어, 중국인의 전통적 윤리 중 가장 기본적인 원리에 위배된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의 옹호자들은 ‘궁극적으로 분석해 들어가면 불교와 유교의 가르침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음’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불교나 유교나 모두 인간의 완성을 추구하며, 교단에 집적된 무한한 공덕은 사회 전체에 이득이 될 것이고, 따라서 도덕과 질서의 유지에 간접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공리적 입장의 공격에 대해서도 사원생활은 정신적 해탈이 속세의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결코 무익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 자신도 ‘사람은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덕을 쌓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반박했다. 끝으로 정치ㆍ경제적 책임에 대해서 승려들은 속세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더라도 법에 어긋남이 없이 충실하게 살아가며, 기본적으로 교단은 평화와 번영을 유지하는 통치자를 지지한다고 했다. 하지만 때때로 구성원 중 일부에 의해 권력과 부가 남용되는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전체 교단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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