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역사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귀족 불교의 발전

관리자 | 2006.03.14 05:03 | 조회 4594

귀족불교의 발전

서기 300년 무렵에는 전쟁과 혼란이 국가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국의 북부는 비(非)한족의 왕조에 의해 지배되었다. 북부의 지식층이 남쪽으로 대거 탈출을 시작하자 많은 승려들도 이에 뒤따랐다. 이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승려들과 지배계급 사이에 이미 확고한 유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후 전개될 중국불교의 역사 전체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바로 불교가 교양 있는 지식층에 파고듦으로써 전형적인 혼성의 고급불교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는 4세기 초기에 양자강 하류지역으로 이식되었고, 이내 귀족들의 지적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중국 중세의 지배계급은 소수의 ‘대가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재산과 권력을 세습받는 씨족이었다. 이 대가족의 우두머리들은 관료조직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왕실을 지배하며, 하위 직책은 친척들과 가신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들 집단에서는 유교가 그 영향력을 크게 상실하고 있었다. 실제 정치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현학적인 여가를 즐기려는 것이 이 계층의 분위기였으며,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열렬한 관심을 나타냈다. 도교의 철학적 입장과 종교적 입장이 모두 지식층 사이에서 많은 추종자들을 확보하였으며, 난해한 논의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대승불교, 특히 공의 심오한 교의를 언제라도 들어줄 수 있는 청중을 발견한 것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서였다. 특히 지둔(支遁, 314~366년)과 같은 학승은 전통적인 중국사상의 용어를 통해 대승의 심오한 뜻을 설명했는데, 이것이 전형적인 중국불교철학의 초석이 되었다. 이처럼 학식이 깊고 존경받는 승려들이 등장함으로써 교단 자체는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이전까지는 어느 정도 중국화된 외국인이 주로 불교를 전파해 왔지만 이때부터 중국인 승려가 배출되기 시작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정신적인 이유로 교단에 참여하였으며, 그들에게는 불교가 아직 우월하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철학적 전통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는 사원이 ‘은둔 생활’의 새로운 형태로 비쳤을지 모른다. 결국 계급의 장벽이 엄격한 중세의 중국사회에서는 원칙적으로 그러한 사회적 차별을 인정하지 않았던 불교의 교단이 교양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상대적으로 가난했던 가문의 구성원들에게 매력을 끌었을 것이다. 그 결과로서 4세기 이후에는 몇몇 대사찰들이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4세기를 거치면서 이런 유형의 불교가 양자강의 하류지역에서 번창하였고 동진(東晋)이 장악한 영토의 다른 지역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불전의 번역은 부차적인 역할만을 하였을 뿐이고, 장안(長安)에 거주하였던 구라마집(Kuma-rajI-va, 鳩滅什)과 그의 학파와 같은 북부의 몇몇 대가들이 이룩한 방대한 저술활동과는 결코 비교될 수 없었다. 남부의 번역가들 중에서는 순례승인 법현(法顯, 317~420년)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인도에 6년 동안 체류하면서 경전을 수집하였고, 매우 가치 있는 여행기를 남겼다. 황실의 호의와 귀족의 지지로 불교는 계속 번창했는데, 380년경 진나라의 황제는 중국의 통치자로서는 최초로 수계를 받고 공식적인 재가 신도가 되었다. 400년경 진나라의 영토에서는 1,700곳 이상의 사찰과 비구니를 포함하여 80,000여 명 이상의 승려가 집계되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집단에서는 반발도 증가하고 있었다. 이들 집단 내에서는 유명한 모든 쟁점을 이용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교단을 차단하거나 국가의 관리 아래 두려는 모종의 시도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남부의 왕조에서는 결코 강력한 억압책을 유도하지는 못했다. 즉 남부에서 불교교단은 계속 성장하였고, 550년에 승려의 숫자는 82,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황실의 후원은 갈수록 두터워졌는데, 열광적인 불교 신자였던 양(梁)나라의 무제(武帝, 502~549년 재위) 치하에서 불교는 그 정점에 이르렀다. 무제는 의식적으로 인도의 유명한 아쇼카 왕을 자신의 모범으로 삼았다. 그는 도교를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을 채근하여 사찰을 건립할 막대한 기금을 조성하고, 공적인 기부금을 내어 사찰에 봉사하였으며, 방대한 종교적 집회를 조직하여 거기서 개인적으로 ‘보살의 서원’을 취하고 경전을 강설하였다. 유교 측에서 편찬한 사서에서는 황제의 이러한 열정에 대해 무책임한 바보라고 비난했을 정도였지만, 반면에 불교의 문헌에서는 극구 칭송되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북부의 왕조에서 불교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대개 한족 출신이 아닌 통치자의 후원을 받았다. 이 후원자들은 불교 승려들을 새로운 유형의 왕실 주법사로서 환영하였다. 승려들이 기도와 주문으로써 그들의 번영과 군사적 승리를 보장해 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승려들을 고문으로 고용하여, 유교의 영향을 적절히 규제할 수단으로서 불교의 교의를 이용하였다. 중국의 역사를 보건대, 이방의 정복자들은 항상 자신의 문화적ㆍ민족적 동질성을 보존하는 일과 완전한 동화라는 상반된 목표 사이에서 시달렸다. 그런데 유교의 사회ㆍ정치적 교의는 가장 강력한 중국화의 힘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국가와 교단 사이의 유착을 이끌었다. 정부는 불교를 방대한 규모로 후원하였지만, 동시에 승려를 관료화시킴으로써 교단을 관리하였다. 그리고 도교는 통치자의 후원으로 불교의 강력한 경쟁 상대가 되기도 했으며, 도사(道師)들의 책략은 불교의 박해를 야기하였다. 교의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은 구마라집의 등장이었다. 쿠차 출신의 위대한 전법사였던 그는 402년에 당시 수도였던 장안에 도착하였다. 그는 중국에 중관철학을 소개하였으며, 대규모의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역경원의 도움으로 방대한 양의 한역경전을 완성하였다. 황실의 후원과 국가의 감독은 북위(北魏)의 통치 하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이들은 중국 북부 전역과 중앙아시아 일부를 장악하였는데, 처음에는 산서(山西)의 북쪽 변경에 수도를 정했다가 494년에는 고대의 수도인 낙양으로 옮겼다. 그 이후로 수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518년에는 낙양 외곽에 1,300개 이상의 사찰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전하지만 이 사찰들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없다. 중국인의 전통에 따라 목조건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그 규모가 대단했음에도 불구하고 허물어지거나 파괴되고 말았다. 그 거대한 사찰들을 묘사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중세의 큰 성당도 왜소해 보일 정도의 탑과 전당을 갖추고 있으며 무궁한 부와 사치를 누렸음을 알 수 있다. 사찰은 인도의 초기 양식과 중국적 양식에 바탕을 둔 혼성 형태의 탑으로 조성되었는데, 낙양에 있었던 가장 유명한 탑은 그 높이가 거의 200미터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놀랄 만한 다른 기념물들은 아직도 남아 있다. 바로 거대한 석굴사원들이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북위의 두 수도 근처에 위치해 있는 대동(大同) 근처의 운강(雲崗) 석굴과 낙양 근처의 용문(龍門) 사원이다. 석굴사원들은 400년경 북서쪽 끝에 위치한 돈황에서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석굴사원들은 위나라와 그 이후의 왕조 치하에서 중국 북부의 10여 군데에 보다 장대한 규모로 계속 조성되었다. 이러한 석굴사원이야말로 중국과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각 요소들이 종합된 종교예술의 진정한 보고(寶庫)이다. 교단에 있어서는 후원과 국가통제의 복합이 적어도 물질적으로는 이득일 수 있었다. 교단의 경제적 기반은 사원의 지주가 되는 일종의 소작제도에 의해 강화되었다. 이 소작인들은 ‘교단 가족’ 또는 ‘붓다 가족’이라 불렸는데, 수많은 농민과 농노로 구성되었으며 대규모의 사찰에 배치되어 사찰의 농지에서 일하거나 잡일을 맡아 하였다. 이 제도가 사찰에 고정수입을 제공하였으며, 토지는 면세되었으므로 사원의 경제는 날로 증진되었다. 그래서 얼마 가지 않아 대규모의 사찰들은 사원의 요긴한 부동산으로 발전하였으며, 토지 개간이나 금융활동 등 다양한 유형의 상업에도 참여하였다. 점차로 불교교단은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어 나갔다. 477년에 위나라에는 약 6,500여 곳의 사찰과 77,000여 명의 승려가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는데, 40년 후에 그 숫자는 각각 30,000여 곳의 사찰과 2,000,0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교세의 확장은 지나친 현세주의와 물질적 이득의 추구, 정치적 갈등으로 이어졌다. 결국 불교교단은 규범을 내세우는 유교적 전통주의자들과 도교의 경쟁자들에 의해서, 그리고 각각 446년과 574년에 있었던 제1, 2차 법난으로 인해 가혹한 박해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이 시대의 불교에 대한 공식적인 후원은 특권이 부여된 소수에 국한되었고, 교양 있는 승려와 교단의 관리자들로 구성된 지식층이 대규모의 사찰들을 이끌었다. 교단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하나는 상급기관을 이루는 상위층으로서 황실이나 통치를 담당하는 지식층과의 밀접한 유대를 맺었고, 또 다른 하나는 소규모의 사찰이나 포교당이라는 방대한 조직에 소수의 승려들이 배치되어 서민들 사이에서 활동했다. 그러는 가운데 불교는 비불교적인 지역적 의례와 종교적 활동이 융합되었고, 경전연구나 지적 논쟁의 세계에서는 그 활동이 점차 감소하였다. 결국 불교의 의식 속에 전통적인 조상숭배의 의례와 대중적인 구세적 운동이 혼합되고 말았던 것이다. 특히 후자는 이 고통의 세계가 결국은 번영과 정의의 이상세계를 세워 줄 미래의 부처인 미륵의 출현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을 두었다. 그러한 운동은 쉽게 정치화될 수 있었다. 중국의 역사에 점철된 숱한 반란운동들에 승려들이 참여하게 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들은 항상 예언자이거나 미륵의 화신임을 자처했다. 불교에 영감을 입은 그러한 모반이 5세기와 6세기 초에 아홉 차례나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철저히 탄압되었다. 불교교단에 대한 정부의 관리와 통제 또한 더욱 거세어져 갔다. 정부는 큰 사찰의 지식층에 대해서는 후원을 하되, 여기에는 제도적인 통제와 경우에 따라서는 경제적 성격을 지닌 가혹한 억제 수단이 뒤따랐다. 그렇지만 교단의 대중에 대해서는 방임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기본적으로 현대까지 견지되었다. 수 세기에 걸친 정치적 분열 끝에 589년 중국은 재통일되는데, 이 시점이 중국불교가 정착된 시기로 볼 수 있다. 요컨대 북부에서나 남부에서나 불교는 온갖 분야에서 중국사회에 고루 전파되었으며, 불교교단은 놀랄 만한 정신적, 물질적 영향력으로 그 나름대로의 사회적 위상을 확보하였다. 교의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경전들과 논서 및 율장(律藏)이 번역되었으며, 중국인 대가들은 이를 근거로 독자적인 교의체계를 세우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토대로 하여 중국불교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수나라와 당나라시대의 창조적 발전이 이루어진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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