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공부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경전비유설화─ 인과응보의 굴레

관리자 | 2006.07.11 06:06 | 조회 983

 


 인과응보의 굴레

업보는 바로 나타나거나 다음 생, 그다음 생에 나타나기도 부처님이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도제(都提)의 아들 앵무마납(鸚鵡摩納)이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부처님. 어떤 인연으로 중생들은 다같이 사람의 몸을 받았으면서도 지위가 높고 낮으며, 얼굴이 잘생기고 못생겼으며, 목숨이 길고 짧으며, 병이 있고 없으며, 위덕이 있고 없으며, 비천한 집과 존귀한 집에서 태어나며, 재물이 많고 적으며 총명하고 어리석게 되나이까?”

“그것은 중생들이 자기가 행한 업 때문이니라. 지은 업에 따라 갚음을 받으며 업을 인연하여 높고 낮음이 생기는 것이니라.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수명이 짧은 것은 다른 생명에게 모질게 굴거나 짐승을 죽여서 그 피를 마셨기 때문이니라. 어떤 사람이 병이 많은 것은 주먹이나 막대기로 다른 생명을 못살게 굴었기 때문이니라.

얼굴이 못생긴 것은 성질이 급하고, 번민이 많아 화를 잘 내고, 걱정과 질투가 많아 다른 사람과 자주 다퉜기 때문이니라.
위덕이 없는 것은 남이 존경을 받으면 질투하며, 남이 좋은 물건을 가진 것을 보면 내 것으로 만들고자 욕심을 부렸기 때문이니라.

어떤 사람이 비천한 집에 태어나는 것은 공경할 사람을 공경하지 않고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오만하고 방자하게 굴었기 때문이니라..

가난하고 재물이 적은 것은 빈궁하고 고독한 사람, 수행자나 거지에게 음식이나 옷, 그리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생필품을 보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어떤 사람이 어리석은 것은 자주 지혜로운 이를 찾아가 참다운 진리를 배우지 않고, 죄가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묻지 않으며, 검고 흰 것을 깨우치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 중아함 44권 170경 〈앵무경(鸚鵡經)〉


- 인과응보에 의한 윤회의 반복은 불교의 중요한 교리 가운데 하나다.
만약 우리의 삶에 인과응보가 없다면 이 세상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이 떵떵거리고 잘 살고, 착한 일을 한 사람이 무릎을 끓어야 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그러나 세상에는 절대 그런 일이 없다. 한때 잘나가던 사람이 초췌한 얼굴로 영락하고, 지지리도 어렵게 지내던 사람이 어느 날 벌떡 일어서는 모습은 인과가 역연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상에는 아직 정의가 살아있다’는 말은 누구도 인과의 법칙을 피해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경전은 그런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런데 가끔은 인과응보가 현실에서 잘 나타나지 않을 때가 있다. 선인악과(善因惡果) 악인선과(惡因善果)도 없지 않다.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숙세의 업이 현재에 나타나는 것이지 인과의 법칙이 무너졌기 때문은 아니다. 업은 바로 나타나기도 하고(順現業), 다음 생(順生業)에, 그 다음 생(順次業)에 나타나기도 한다.

이를 삼시업(三時業)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업이란 내가 마음먹고 행동한 결과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어떻게 마음먹고 행동하느냐에 의해 미래의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인과응보는 기계적 결정론이 아니라 의지적 행위론으로 이해해야 한다. 개과천선만 하면 전혀 다른 과보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
중생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쁜 마음으로 나쁜 짓을 하며 산다. 그런 악업을 짓는 사람들은 지금부터 마음을 바꿔 선업을 짓는데 힘써야 한다.
안 그러면 정말 큰일 난다고 부처님은 이 경에서 경고하고 있다.

       홍사성/ 불교평론 편집위원

* 용화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4-07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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