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공부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부처님이야기 ─다섯 비구(9)

관리자 | 2007.04.09 10:10 | 조회 1866
중생의 편에 서다 멀리서 걸어오시는 불타의 모습을 보고 교진여 등 다섯 사람은 그들은 부처님이 오더라도 못 본 채하고 침묵하기로 서로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처음의 약속과는 달리 불타가 자기들에게 접근하여 오자 자기들도 모르게 모두 일어나 옛날과 다름없이 서로 다투어 시중을 들게 되었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어서오십시오. 장로 고타마여, 먼길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여기에 편히 앉으십시오.” 불타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어리석은 자들이 그 뜻이 굳건하지 못하여 함께 약속을 하고서도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스스로 어기고 있구나. 그것은 불타의 위신력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시면서, 그들이 깔아놓은 자리에 앉으시면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위없이 존엄한 이에게 교만한 마음으로 함부로 나의 성을 부르느냐? 내 마음은 허공처럼 텅비어 옛날의 과보를 불러들이고 있다. 자식이 부모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세속의 법에서도 옳지 못하거늘 하물며 나는 깨달아 일체 모든 중생의 부모가 되었으니, 이름을 부르거나 세속의 지위로 부르지 말라.” 그러면서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감로법을 깨달아 죽음이 없는 길을 얻었다. 너희들은 나의 가르침을 따라 나의 말을 귀담아 들어라. 나는 이제 너희들을 가르쳐 보일 것이다. 너희들은 내 말을 따라 어기지 말고 가르침에 의지하여 청정히 살라.” “사문 고타마여, 그대는 출가하여 고행을 하다가 선인의 법도 얻지 못하고 타락하여 공양이나 받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습니까?” “그런 소리하지 말라. 나는 타락하지도 않았었고 선정을 잃지도 않았다. 나는 아뇩다라삼약삼보리를 얻었고 이미 불사(不死)의 길을 성취하였다. 너희들은 내가 거짓말을 하거나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보았느냐? 나는 이제 내가 얻은 법을 가르치려 한다.” 이처럼 부처님의 단호한 자세에 압도된 다섯 비구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구 출가자들이여, 두 개의 극단을 가까이 하지 말라. 그것은 쾌락에 빠지는 것과 스스로 지나친 고행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극단은 지혜롭고 성스러운 법이 아니다. 그것은 몸과 마음을 피로하게 하여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게 한다. 비구들아, 이 두 개의 극단을 떠나 다시 중도의 길이 있다. 그것은 눈을 밝게 하고 지혜를 증진시키며 길이 번뇌를 쉬고 고요하게 한다. 이러한 중도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지혜롭고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올바른 길이다. 다시 네 가지 성스러운 가르침이 있다. 그것은 현실적인 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가르침이고, 그러한 현실의 고통이 왜 생기느냐에 관한 가르침이다. 또한 고통을 없애 버려 열반을 얻은 상태를 말하는 가르침과 고통을 없애는 바른길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것이 유명한 사성제이다. 처음으로 제자들을 향해 법을 펼친 것이라 하여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모든 중생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고통을 치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불씨를 재로 덮어놓았을 때 언제라고 마른풀을 만나면 불길이 타오르는 것처럼 모든 고통은 나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 만약 중생이 조금이라도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면 다시 고통을 받게 된다. 또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은 모두가 나라는 생각을 조건으로 일어나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은 독과 같이 고통을 생기게 한다. 마치 씨앗이 능히 싹을 트게 하는 것과 같다. 중생은 이것으로서 삼계를 윤회하게 된다. 만약 나라는 생각과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끊어버린다면 모든 고통도 끊게 된다. 그것은 모두가 여덟 가지 지혜롭고 성스러운 바른길에 의한다. 사람들이 이러한 제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은 해탈을 얻을 수가 없다고 하시면서 만약 이러한 네 가지 성스러운 가르침을 설하고 그것을 듣는 사람 중에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있을 때라야 여래가 법을 설한 것이 된다고 하신 것처럼 불타께서 사성제를 설하시자 5명의 비구들 가운데 교진여가 먼저 모든 번뇌를 소멸하고 법안(法眼)을 얻게 되었다. 교진여가 법에 눈뜨게 되었다는 것을 아신 부처님은 기쁨에 넘치신 말로 말씀하셨다. “교진여는 깨달았다. 교진여는 깨달았다. 오늘부터 교진여를 아야교진여라고 이름한다”고 선언하셨다. 교진여의 깨달음은 교진여 자신에게만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다. 법을 설하신 부처님 자신에게도 큰 기쁨이 되었다. 자신이 깨달은 법을 말했을 때 과연 그것을 이해하고 깨닫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과 이곳을 바라나시를 향해 오시다가 범지 우다야를 만나 자신이 깨달았음을 말했으나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전했을 때 깨닫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바로 불타의 설법이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5사람이 똑같이 법을 들었으나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은 교진여뿐이었다. 그래서 불법의 가르침을 받고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첫 번째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먼저 깨달음을 성취한 아야 교진여는 성안으로 들어가 결식을 해오고 나머지 4사람을 향해 설법을 하니, 아습비와 마하마남 두 사람이 다시 깨닫게 되었다. 이때 이들을 위하여 말씀하신 가르침은 보시와 지계와 선행을 닦아 천상에 나게하는 선법(善法)이었다. 즉 욕심에 빠져있는 것은 청정한 삶이 못됨을 보여 일체의 세간적 애착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세 사람은 계속하여 때가 되면 걸식을 하게 하고 부처님은 나머지 두 사람 파제와 파바을 위하여 보시(布施), 지계(持戒), 생천법생(生天法)을 가르쳐 드디어 다섯 사람 모두가 깨달았다. 이때의 생활을 살펴보면 불타께서 세 사람에게 법을 설하면 세 사람이 결식해 와서 여섯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면 다섯 사람의 비구들에게 우리들 존재(오온)가 무아(無我)이며 무상(無常)하며, 그것은 마로 고(苦)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일체의 모든 물질적 존재는 '나' 라고 할 것도 못되며 그렇다고 '너'라고 할 것도 아니며, '나의 소유뮬'도 아니고, '너만의 소유물'도 아니다라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하여 오온에 대한 집착을 떠나 해탈을 얻고 지혜를 얻으며 다시는 삼계에 윤회하지 않고 해탈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5명의 비구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였다. 이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다. “이 세상에는 여섯 사람의 아라한이 있으니, 다섯 사람의 제자와 여래(如來), 응공(應供)· 정편지(正遍知)·부처를 합하여 여섯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 처음으로 삼보(三寶)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불아라한은 불보(佛寶)이고, 네 가지 성스러운 가르침(가르침)은 법보(法寶)이며, 다섯 사람의 제자 아라한은 승보(僧寶)가 되는 것이다. 이 삼보는 천상과 인간 세상의 첫째 가는 복전이 되었다. 부처님께서 다섯 비구와 함께 바라나시에 계실 때 이 지방의 거부장자의 외아들 야사를 교화하게 되었다. 그는 호화로운 쾌락적의 삶에 회의를 느껴오다가 부처님을 뵙고 오온 개공과 사제설법을 듣고서 아라한과를 얻었다. 야사를 교화하시고 게송으로 야사에게 말씀 하셨다. “비록 다시 집에 돌아가 화려한 장신구와 비단옷을 입고 산다 하더라도 모든 욕망의 근원을 잘 다스려 오욕에서 떠나도록 하라. 스스로 이렇게 하는 것은 진실한 출가라고 할 수 있다. 설사 몸은 깊은 산속에서 걸식을 하고 누더기를 입고 살더라도 마음이 다섯 가지 욕망에 매달려 있으면 출가라고 말할 수 없으리라. 일체 모든 선과 악을 짓는 것은 모두 마음속의 생각을 따라 생기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진실한 출가라고 하는 것은 모두 마음으로서 근본을 삼는다.” 고 말씀하셨으나 야사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출가할 것은 간청하여 드디어 구족계를 받고 출가 사문이 되었다. 집나간 아들을 찾아 나섰던 야사의 아버지도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불법에 귀의하게 되니 최초의 재가 남자신도인 우바새(Upasaka)가 되었다. 야사의 아버지는 삼보에 귀의하여 오계를 받은 최초의 불자가 된 것이다. 야사의 아버지는 재가 불자가 되고 부처님과 제자들을 자기 집으로 모셔 공양 올리기를 청하였다. 공양을 받으시고 야사의 집에서 설법을 하시니 설법을 들은 야사의 어머니도 환희하며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받아 최초의 여자신도인 우바이(Upasika)가 되었다. 이때에 야사와 가장 친했던 친구4명을 비롯하여 54명의 성안 청년들이 야사가 출가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와 출가 비구가 되기를 간청하였다. 이들에게 법을 설해주시고 그들을 원을 받아들여 출가 비구로 삼으니 부처님의 제자들이 60명에 이르렀다. 부호의 아들이며 한창 젊은 나이의 야사가 출가하였다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충격이 되었던 것이다. 부처님은 60명의 제자들을 모아 놓고 전도의 선언을 하셨다. “비구들아, 그대들은 이미 해탈을 얻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 그리고 세상에서 구하는 미래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법을 전하러 가자. 다른 마을로 가 때 길을 두 사람이 가지 말고 혼자서 가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니 이치에 맞게 조리와 표현을 갖추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법을 저하라. 원만 무결하게 청정한 범행을 설하라. 중생들 가운데는 번뇌가 적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법을 듣지 못하면 악에 떨어질 것이나 법을 들음으로 성숙해질 것이다. 비구들아 나도 이제 법을 전하기 위하여 우루벨라의 병장촌으로 가서 설법하리라.” 전도의 선언이라 할 수 있는 이 말씀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깨달음을 성취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설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번민에 빠져 있는 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은 위하여 설하여야 한다. 불법을 전파하고자 하는 길에는 저항이나 박해 같은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감정에 호소하여 절규하는 예언자적 태도나 권위를 앞세워 맹목적으로 따르게 할 것이 아니라 조리와 표현을 갖추어 이성적으로 그들을 성숙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자들만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도 옛날에 수행하였던 왕사성으로 되돌아가 설법하겠다는 적극적인 전도의 의지를 보임이다. 그것은 당시의 바라문교도들이 자신들의 사상과 철학을 비공개적으로 스승과 제자들 사이에 전달하려한 자세에 비하여 적극적으로 법을 공개하라는 뜻이다. 그것은 불교적 가치관이나 법의 내용이 보편적이고 타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등정각 또는 정변지라고 할 것이다. 또한 깨달음을 성취한 다음의 경지는 제자나 스승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보였으니 부처님이나 제자를 아라한이라고 부른 점이다. 각기 법을 전하러 가기 전에 제자들은 현지를 부처님께 물었다. “저희들이 법을 전할 때 법을 듣고 환희하여 출가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반드시 여래가 계신 곳으로 인도하여야 되겠지만, 만약 사정이 그렇지 못하여 중도에서 구족계를 준다면 그것은 잘못 되는 것입니까?” “오늘 이후로 법을 듣고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는 이렇게 하라. 삭발을 하고 가사를 입히고 가죽 신발을 벗게 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합장케 한 다음에 '아무개가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이제여래가 계신 곳에서 출가하오니 여래 응공 등정각 부처님을 제가 받들어 모시고자 합니다'라고 세 번을 시킨 다음 구족계를 주어라”    * 용화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4-07 14:09)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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