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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설과 연기설 (2)

관리자 | 2006.09.08 07:20 | 조회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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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margin-top:2px;margin-bottom:2px;} 무아와 업보

우리는 행위의 주체, 즉 작자가 행위를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의 주체를 자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붓다는 이러한 행위의 주체의 존재를 부정한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눈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인지하는 자아, 행위하는 자아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의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다.

따라서 행위하는 실체는 없고, 오직 행위를 통해 상호 영향을 받는 관계, 즉 업보만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연기설이라는 상호인과율에 의해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을 이원화된 실체로 보지 않고, 행위를 통해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관계로 이해한다.

이러한 붓다의 무아설은 자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는 것은 불변하는 실체(作者)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나

행위를 통해 변화해 가는 업보로서의 자아는 있다는 것이다.

즉 착한 사람(작자)이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착한 일(業)을 하면 착한 사람(報)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아설의 근본취지이다. 인간의 본질은 영혼도 정신도 물질도 아니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인간의 본질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삶에 의해 스스로를 이룬다. 즉 인간의 본질은 업보이다.

Majjhima-Nik ya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모든 중생은 업의 소유자이며, 업의 상속자이며, 업에서 나온 것이며, 업의 친척이며, 업을 의지처로 한다.

 

작자는 없고 과보는 있다.말은 무엇인가.

세존은 업보를 인정하지만 불멸의자아를 인정하지 않았다
세존은 무아와 업보에 대하여 (제일의공경)에서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업보는 있으나 업을 짓고 보를 받는 행위의주체로써 자아는 없다고 한다."

 

우리는 사물을 볼때 보는 자아가 존재하고 있으며 이 자아가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을 본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사물을 볼때 보는 나를 의식하며 이러한 의식을 토대로 자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보는 나를 볼수없고 듣는 나를 들을수 없다. 우파니샤트에서 는 보기 때문에 눈, 듣기 때문에귀,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라 불린다. 이 모든것은 아트만에 대한 활동이다. 이러한 견해는 우리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눈이 사물을 본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아가 눈을 통해 사물을 본다 생각한다.

 

이 철학자들은 눈 코를 통해 사물을 지각하는 자아를 아트만이라 불렀다.

그래서 그들은 볼때 보는자를 볼수없고 들을 때 듣는자를 들을수 없고 생각할때 생각하는자

를 알수 없고 알때 알수 없으나 그 모든것속에 들어 있는것이 아트만이라 했다.

 

아트만은 불멸의 존재로 보이지 않으나 보는자요........ 알수 없으나 아는자로 생각했다.

세존은 제일의 공경에서 아트만과 같은 자아를 비판했다.

 

우리는 보고 듣고... 할때 행위하는 주체로써 자아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듣고 행위하는자아를 찾아보면 우리에게 관찰되는것은 행위하는 자아가 아니라 지각 즉 보고 들음으로써 생성된 느낌뿐이다. 이런 느낌이 보고듣는 자아의 실체이다., 볼때보는자가 있다는 생각이 나타나며 이생각이 자아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보는자는 보지 않을때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만약볼때는 나타나고 보지 않을때 사라지는 보는자가 자아로 실재한다면 그자아는 보기전에 어디선가 숨어있다가 볼때는 나타나고 보지 않을때는 그곳으로 사라져야한다.

 

자아가 나타날때 오는 곳과 사라질때 가는 곳이 과연 존재하는가.

보는자가볼때 온곳이 없이 나타나고 보지 않을때 간곳이없이 사라진다면 그러한 보는자는 실체성이 없는존재이다.

 

 여기서 세존은 단언한다.

"보는 행위(업)와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지각(보)는 있지만 보는자 로써 자아는 없다.


이것이 무아이며 공이다. 연기설에 기초한 무아설과 공사상은 바로 불교의 업설이다.

작자는 없고 과보는있다라는 말은 무아설과 업설을 말해주는 말이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라는 말은 업을짓고 과보를 받는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업을 지으면그 과보로써 자아와 세계가 나타난다는 말이다.

 

즉, 도둑이 있어서 도둑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둑질을 하면 그 과보로써 도둑이 되고 그 도둑에게는 도둑의 세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중생의 세계

전변설과 적취설이 세계와 임간을 설명하는 외도들의 사상이듯이 연기설은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는 불교사상이다. 연기설은 또 현실세계와 자아를 어떤 실체의 이합집산으로 보지않고 무명에서 연기 한것으로 보며, 이러한 연기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십이처 .십팔계.오온등의교리다. 이가운데 십이처는 세계와 자아의 근원이다. <잡아함319경>의 세존과 생문이라는 바리문과 대화를 보자.


생문 ; 구담이시여, 소위 일체는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했다.

세존 ; 일체란 십이처를 말한다. 보는자와 보이는 모습, 들는자와 들리는 소리, 냄새맡는자와 냄새, 맛보는자와 맛, 만지는자와 만져지는 촉감, 생각하는자와 생각되는 사물, 이것을 일체라 부른다. 만약 이것은 일체가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언설만 있을뿐 물어도 알지 못하고 의혹만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

 

이 경에서 바라문이 묻고있는 일체는 세계와 자아의 근원을 말한다. 우파니샤드에서 " 일체는 브라만이다. 일체는 여기서 생겨나고 돌아간다. 그러므로 편안한 마음으로 경배하라 실로 인간은 욕망으로 되어있다. 인간은 세상에서 갖는 욕망에 따라 내세에 존재한다." 라고 이야기 한다. 세존에게 질문하는 바라문은바라문교에서 이야기하는 브라문과 같은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세존의 견해를 묻고 있다.

 

 이러한 모든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바라문교에서는 브라만이라 주장했고 사문들은 사대와 다양한 요소라 이야기 한다. 이들은 불멸의 실체를 생성 변화하는존재의 근원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세존은 모든 존재의 근원을 불멸의 실체라 하지않고 우리의 지각구조, 즉 십이입처라고 이야기한다.


다음은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말이다. " 내 개인적입장에서 보자면 나자신이 나 라고 부르는 것에 가장 가깝께 갈때, 나는 항상 즐거움, 차가움, 빛, 어두움, 사랑, 미움,고통, 기쁨, 이러한 지각을 더듬어 가고 있을뿐이다. 나는 이러한 지각없이 자신을 포착한적이 없으며, 이러한 지각외에는 아무 것도 관찰한것이 없다."고 한다.

 

비단 자아 뿐만아니라 우리가 존재의 근원을 찾아갈때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보이고, 들리고, 생각되는 지각일뿐 어떤 실체도 발견 되지 않는다. 세존이 일체는 십이처라하면서 다른것은 일체라 하지 않는 것은 외도들의 주장하는 존재의 근원은 관찰에 의해 드러난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의심하고 추구할때 어떤 해답도 주지 않음을 의미한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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