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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설과 연기설 (3)

관리자 | 2006.09.08 07:23 | 조회 2416
업설과 연기설
십이처는 일반적으로 육근, 육근 과 동일한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크게 잘못된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점은 차후에 상세히 논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일체를 십이처라고 한 세존의 입장과 당시 외도들의 입장이 어떻게 다른가 살펴보기로한다.십이처를 일체의 근원이라 보는 보는 세존의 세계관 븓, 연기설과 어떤 실체를 내세워 그것을 세계의 근원으로 주장하는 외도들의 전변설이나 적취설은 근본에서 큰 차이가 있다.

 

전변설이나 적취설은 현실세계를 어떤 불명의 실체에서 파생된 것으로 본다. 하나의 실체가 자기 전재를 통해 다앵한 존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전변설이고, 다수실체가 이합집산 하면서다양한 존재현상으로 보이고 있다는 것이 적취설이다. 외도들은 이와같이 서로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지만 존재의 근원을 불명의 실체하고 한점에 대하여 차이가 없다. 우리가 말하는 존재는 인식된 것이다.

 

 우리가 ‘무엇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이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보이면 있다고 말허고 들리면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존재의 근원은 인식이다. 혹자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인식되는 것이 어닌가 반문 할지 모른다.이러한 샹각은 우리외부에는 인식의 대상으로써 세계가 실재하고  내부에는 인식하는 자아가실재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신념을 거지고 있는 것이 세존이 말하는 미혹한 중생이다.<장아함294경>에서 세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리석고 배우지 못한 범부는  무명에 가리여 애욕에 묶이어 식이 생기면 몸안에 식이 있고, 몸밖에는 명색이 있다고 분별한다. 이 두인연으로 ‘촉’이 생긴다.


 이경에서 이야기하는 식은‘인식하는 자아’를 의미하고 ‘명색은 ’인식되는 대상을 의미‘한다. 유리는 실재하는 자아가 실재하는 대상을 접촉할 때 인식이 성립된다고 생각한다. 세존은 이러한 우리의 생각이 무명과 애욕에서 비롯된것임을 깨달았다.십이처는 바로 중생들이 무명과 애욕에 묶이어 실재한다고 믿고 있는 ’인식한자아‘와 ’인식하는 대상‘을 의미한다.

 

이예는 십이처라는 말은 중생들의 세계가 중생들의 그릇된 신념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상응부니까여>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세간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과 신념이 있게 하는 것 그것을 성법률에서는 세계라 한다. 무엇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과 신념을 있게 하는가? 법우들이여, 안( 보는자아)에 의해서  이,비,설,신,의에  의해서 세간에 세계까 존재한다는 생각과 신념이있다. 이것을 성법율에서는 세계라고 부른다.


중생들은 인식하느자아가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육입처는 바로 중생들이 실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인식하는자아’이다. 인식하는 자아가 실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식하는 대상’도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중생들이 말하는 육입처의 세계는 육입처의 인식대상인 것이다.

 

 육입처는 우리의 삶의 구조를 ‘자아’로 착각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구조는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지만 삶의 형태는 저마다 다르다. 어떻게보고 어떻게 생각하는 가는 사람마다 다른것이다.이렇게 저마다 다르게보고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에 인식되는 내용도 달라진다.

 

중생들이 세계라고 부르는 것은 저마다 달리보고 생각한 것들 이다. 그래서 각기 다른세계관과 다른 인생관을 갖게된다. 이때 어떻게보고 어떻게 생각할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마음이다.. 따라서 세계는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마음에 의해서 나터난 것이라 할수 있다. 우리는 세계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의해 규정된 삶에 의해 자신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수 있다.

 

결국 세계는 마음에서 연기 한것이고, 십이처는 중생의 세계가 연기하는 중생의 마음인 것이다. 이와같이 세계의 근원이 되는 마음은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삶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며, 삶을 업이라 할때 마음은 업의결과, 즉 ‘보’이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라는 ’라는 새존의 이야기는 인식의 주채로써 불멸하는 ‘자아’는 없으나 삶에 의해 형성되어 삶을 이끌어가는 과정으로서의 마음은 있다는 의미로 재햐석할수 있다. 이와같이 연기설은 업에의해 마음이 형성되고, 그렇게 형성된 마음으로 업을지어 모든존재가 연기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불교의 업설이다.

 

 

업보와 마음

붓다는 업이 반드시 보를 가져온다 하였다.자이냐교에서는 그러한 업을 괴로운 결과를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물질적 실체로 보았다.그러나 세존은 업을 마음에서 일어나 마음을 형성하는 우리의 삶으로 보았다. <중아함사경>에서 세존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때 세존은 여러비구들에게 말했다.

 

만약 고의로 지은 업은 현세든 내세든 반드시 그보를 받는다. 만약 고의로 지은 업이 아니면 그 보를 받지 않는다. 업은 인간의 행위다. 우리는 의도없이 다른 생명을 죽일수있다. 만약 업이 실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부지불식간에 행한 악업으로 괴로움을 받아야한다. 그러나 업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업"의 결과 즉 "보"는 마음의 상태로. 나타난다.

 

우리의 삶은 마음에서 비롯되며 삶을 통해 마음은 항상 새롭게 형성된다. 이렇게 마음에서 비롯된 삶이 업이고, 삶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것이 보이다. 세존이 말하는 업보는 삶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마음을 의미한다.(중요) 이러한 마음이 업에 따라 형성되는 것을 연기 한다고 말하고 실체성이 없기 때문에 무아라 한다. 이런 마음은 바라문교-아트만, 자이나교-명아, 우리가 생각하는 영혼도 아니다.

 

여기 살아서 움직이는 삶이 곧 마음이다.이 마음에 갖가지 중생의 세계도 일어나고 부처의 세계도 일어난다.우리가 착하게 살아여할 까닭은 착한 삶을 통해 즐거운 마음이 형성되기 때문이며, 악한 삶을 살아서 안되는 까닭은 악한 삶을 총해 괴로운 삶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세존이 '고의로 업을 지으면 반드시 보를 받는다고 한 것은 업을 지어서 불변하는 실체가 있어서 업을짓고 보를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 "마음에서 비롯된 업을 지으면 그 결과 그에 상응하는 마음의 변화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세존이 말하는 자업자득이다.

 

<중아함 염유경>에서 보여주는 마음의변화로..다음과 같이 말한다.

..........적은 물에 한냥의 소금은 물을 짜게 하지마는, 갠지즈강에 한냥의 소금은 강의 물을 짜게하지 않는다.............

이경에서 물은 마음을 비유한것이고 소금은 업을 비유한것이다. 우리가 선행으로 충만해 있으면 조그만 악행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악행으로 가득차 있으면 조그만 악행도 큰 괴로움을 가지고 온다는것이다.


이와같이 업은 그자체로 어떤 결정된 결과를 가져오는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따라 가기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이경의 요지다. 그래서 업은 마음에서 비롯하여 새로운 마음을 형성시킨다. 업은 마음에서 일어나고 그 보"는 새로운 마음이 형성되므로 업보는 곧 '마음"이다. 대승불교의 유식사상은 이러한 업설을 계승 시킨 것이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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