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역사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북방불교

관리자 | 2006.03.14 05:08 | 조회 4482

북방불교

1. 티베트

소승, 대승, 밀교가 잘 어우러져 있는 티베트불교의 역사는 손첸감포(581~694년) 왕 때로부터 시작한다. 손첸감포 왕이 재위하던 당시 인도와 중국, 두 나라에서 거의 동시에 유입된 불교는 그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티베트인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종교가 되었다. 특히 티송데첸 왕이 재위하던 794년에는 삼예사에서 중국계 불교를 대표하는 마하연과 인도계를 대표하는 카마라쉴라(740~797년) 사이에 대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는 불교사적으로도 매우 유명한 사건으로 남아 전한다. 그 때 마하연과의 대론에 승리한 카말라쉴라는 인도 중관사상을 티베트에 전수하는 데 성공했지만, 마하연이 보낸 네 명의 중국인들에 의해서 위장이 도려내지는 참살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치열한 대론의 역사를 바탕으로 성장한 티베트의 불교사는 짧은 폐불기와 침체기를 제외하고는 정치,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지도이념으로서 확고한 자리 매김을 해 왔다.
티베트대장경(일부)13세기 후반에는 티베트대장경을 완성하여 자국어로써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됨으로써 불교의 보급이 더욱 활발해졌다. 또한 티베트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달라이라마라는 법주(法主)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는 점인데, 달라이라마의 계승 자체가 불교적 전생(轉生)사상을 토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매우 독특하다. 이러한 특징에 주목하여 티베트불교를 흔히 ‘라마교’라고도 한다. 그런데 외세의 끊임없는 침탈에도 굳건히 나라와 신앙을 지켜왔던 티베트는 1950년 가을, 중국 공산당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후 중국은 티베트를 서장 자치구로 강제 편입시킨 뒤 사원을 파괴하고 승려에 대한 박해를 자행했다. 나라 잃은 티베트 유민들은 중국의 탄압을 피해서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흩어지는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접경해 있는 인도에 정착했다. 현재, 티베트불교는 티베트 국경 밖에서 활발히 전파되고 있으며, 그들의 불교문화에 대한 이방인들의 관심은 더욱더 확산되어 가는 추세이다. 특히 달라이라마는 티베트인들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큰 몫을 다하고 있다는 점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2. 네팔

네팔은 고타마 붓다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는 룸비니 동산이 자리한 곳으로 유명하다. 현재 총 인구 2,500만 명 중에서 약 5% 정도만이 불교도일 뿐, 거의 대부분은 힌두교도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원에는 힌두 신상과 나란히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네팔에는 힌두교와 불교가 습합되었던 인도불교의 말기 현상에서 좀더 힌두화 경향이 심화된 형태가 잔존해 있다고 볼 수 있다. 5세기부터 9세기까지 네팔을 지배했던 릿차비 왕조 때, 힌두교와 함께 불교도 유입되어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6세기 중엽의 라마데바 왕 시절에는 관세음보살신앙이 성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점차로 여러 신격과 보살신앙이 등장하였고, 이어서 밀교가 자리잡았다. 그러나 힌두교의 세력이 한층 커지게 되고 마침내 힌두교 속으로 불교는 완전히 흡수되다시피 하여 두 종파의 신도를 가름 짓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로 통합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현재, 네팔의 불교를 힌두교와 분리하여 명료하게 이분하고자 시도한다면 십중팔구는 실패할 것이다. 그만큼 네팔불교의 의례나 사상은 힌두교의 영향 아래 놓여 있고, 신도들의 신앙 면에서도 양자 구분은 무의미할 만큼 합체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네팔의 불교를 가리켜 ‘힌두교 옷을 입은 불교’라고 말하며, 인도불교의 최후의 양상이 네팔 땅에서 보다 더 진전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3. 몽고

비단길을 통해서 중앙아시아에 유입된 불교는 몽고에서도 선진사상으로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티베트 왕의 스승으로서 추앙받던 팍파(1239~1280년)는 몽고에 티베트불교를 전파하고자 노력했다는 기록도 남아 전한다. 16세경에는 불교가 몽고 전역으로 보급되어 전 국민의 신앙으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는데, 특히 몽고의 지배계층을 비롯한 지식계급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수많은 이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들 중에서 칭기스칸의 후예인 자나바자르(1635~1723년)는 수많은 사원을 건립하고 불교예술에도 조예가 깊어서 탁월한 성과를 남겼다. 특히 조각상을 주조하는 데 뛰어났던 자나바자르의 작품에는 몽고인의 심미적인 이상이 잘 표현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인도에서 전통적으로 전수되어 온 불교 도상학에도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몽고의 승원은 정치적인 변화와 더불어 쇠퇴의 길을 걸었으나, 민중들의 신앙은 맥이 끊기지 않아서 지금은 다시 부흥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4. 일본

일본의 불교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중국과 우리나라이다. 공식적인 불교의 전래는 538년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용명(用明) 천황의 제1 황태자였던 성덕태자(聖德太子, 574~622년, 573년부터 섭정)가 불교의 수용과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전한다. 성덕태자는 중앙집권을 이룬 뒤 불교사상을 기조로 하여 통치함으로써 일본불교의 기틀을 닦았다. 또한 그는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불교를 비롯한 선진문화를 수입하는 데 전력하였고 사천왕사를 창건하였다. 중국불교가 최성기에 달해 있던 나라(奈良)시대 때는 여러 종파가 유입되었으며, 그 결과 남도육종(南都六宗)이 정립되었다. 6종은 삼론종, 성실종, 법상종, 구사종, 율종, 화엄종 등이었으며, 일본의 사상 형성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일본불교 종파의 특징은, 개인이 각 종파를 두루 섭렵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한 사찰에서 여러 종파를 겸하는 경우도 많았다는 점이다. 이는 일본에서의 각 종파는 학문적 구분으로 받아들여졌을 뿐 파벌적 대립성은 약한 탓으로 보여진다. 일본에서의 불교는 국가의 지배와 통제를 받으면서 전개되다가, 가마쿠라(鎌倉)시대에 이르러서야 소위 민중불교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지 600여 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민중의 종교로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러나 일본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현재 가장 많은 신자 수를 보유한 최대 종파인 정토진종(淨土眞宗) 교단이 승려의 독신계율을 포기하였다는 데 있을 것이다. 정토진종을 비롯한 일본의 대다수 종파에서는 출가 승려라 해도 독신 생활을 하기보다는 결혼을 하고 개인 소유로 되어 있는 사찰을 자식에게 상속하고 있으며, 승려 신분으로도 다른 직업을 택하여 종사하는 예가 많다. 이러한 일본의 승려를 가리켜 ‘비승비속(非僧非俗)’이라 부르기도 한다. 중국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사고방식으로 불교를 수용하고 적절히 변용시켰던 것과 같이, 일본에서도 토착신앙인 신도(神道)와 결합하여 붓다를 신도적 신의 일종으로서 섬긴다든지, 일본 특유의 세속화된 방식으로 불교를 수용하여 변용, 발전시켰다. 그들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이나 욕구나 관습을 부정하지도 억누르지도 않으면서, 어떤 초월적 영역에서가 아니라 세속생활의 구조 내부에서 만족스럽고 궁극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방식으로 불교를 발전시켜 왔다. 일본불교사에 등장하는 고승들 대부분이 세속생활을 중시하여 계율의 준수는 형식주의에 불과하다고 폄하시켰다. 그 결과, 일본불교는 일본 문화를 대표하는 한 양식으로 자리 잡았으며, 다도(茶道), 원예, 서예, 그리고 ‘노오(能)’라고 불리는 가면 음악극 등에 불교정신을 수용하여 우아하게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5. 대만

공식적으로 대만(臺灣)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1661년 명나라 영력(永曆) 10년 봄이었다. 그 때 정성공(鄭成功)이 대만을 침공한 이래로 명나라의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되었고 불교도 함께 전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전의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민간신앙의 차원에서는 이미 보급되었으리란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는 수나라와 당나라를 비롯하여 송나라 때에 이미 중국 전역에 유포되어 있었고, 대륙과 대만 간의 왕래는 매우 빈번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식적인 전래 이전에 이미 대만 전역에 걸쳐 많은 불교신도가 있었으리라고 보고 있다. 1683년 8월에는 청(淸) 왕조가 대만을 점령하였으며, 곳곳에 사원을 건립하였다. 그런데 그 시대에는 특히 관음신앙이 성행했는데, 대부분의 사원관련 건물이름으로 ‘관음’을 내걸 정도였다. 예컨대 관음사(觀音寺), 관음궁(觀音宮), 관음묘(觀音廟), 관음정(觀音亭) 등이었다. 이러한 관음신앙의 성행은 사회적 상황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고난에서 구제해 주는 관음의 이상은 불안한 민중의 심리를 위로해 주기에 적합했기 때문에 명ㆍ청의 사회적 변혁기에 대만 각지로 퍼져 나갔다. 그런데 1895년부터 거의 50년 동안 대만이 일본의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일본불교도 유입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패전 이후에 대만 곳곳에는 ‘불교학원’이 창립되어 각 지방의 신앙적 구심점을 이루었다. 15곳에 달하던 불교학원 중에서 지금도 4곳의 불학원(佛學院)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불학원은 불교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곳으로서 한국식 강원과 대학의 절충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대만의 사찰들은 대부분 독립법인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유치원부터 중ㆍ고등학교 및 병원까지 갖추고 있다. 대만불교의 교세는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20년 동안에, 급속히 발전하였는데, 중화 대장경(中華大藏經)의 편찬을 비롯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고, 여성 출가자의 수도 급증하여 수행과 포교면에서도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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