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공부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관음경의 개요

관리자 | 2006.04.11 12:40 | 조회 1799

              
                
                 관음경(觀音經)이란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을 독립된 경으로 만든 것으로서,
  관음신앙의 가장 대표적인 경전이다.
  내용은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에 의지하면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  고, 갖가지 재앙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현세 이익적인 공덕을 강조한 것이다.
또 관세음보살의 32응신(應身)이 서술되어 있는데, 그것은 제도해야 할 중생이 어떠한가에 따라 불․보살․임금․부녀자 등 서른 두 가지 모습으로 몸을 나타내어 중생들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준다고 하였다.

 「관음경」이라는 경전으로 독립되어 유포될 만큼 불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 경은 다른 어떠한 경전보다도 이 경을 염송하면 일곱 가지 어려움(七難)을 면하고, 세 가지 독한 것(三毒)을 없애고, 현실에서 바라는 바 소원을 성취한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가운데 일곱 가지 어려움이란 물․불․바람․나찰(那刹)․도적․용어(龍魚)․맹수로부터 당하는 어려움이고, 세 가지 독한 것이란,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이다. 끝으로 보문(普門)의 의미를 살펴보면, 보문은 무량문(無量門)과도 통하는 말로써, 관세음보살께서 32응신, 즉 가지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문(門)이란 뜻이다.    

 
인간 구원의 신앙
《관음경(觀音경)》

인간 구원의 신앙을 아름답고 쉽게 설하고 있는 경전이다.

《관음경》이 설하는 인간 구원의 신앙이란
불교의 교리적 이해만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세계,
일념으로 관세음 보살을 염원하는 신앙,
굳세고 청정한 믿음의 세계에서 발현되는
자성 관음(自性觀音)에의 신앙이다.

따라서 《관음경》이 설하는 인간 구원은
인간은 깊은 숙업과 고난하고 이를 다시 해탈로 이끈다.
신앙은 사상과 예술을 낳는다.
관음신앙은 저 의상대사의 백화도량발원문을 낳았으며
신라 향가(鄕歌)의 禱千手觀音歌)와 아름다운 고려 불화를 남겼다.
그 겸허한 신앙과 종료적인 열정은 바로 관세음보살의 신앙이었다.

《관음경》은 바로 이 관음 신앙의 정수를 설하는 경전인 것이다.
옛부터 불교도들은 관음경에서 관세음 보살의
지혜와 자비를 깨닫고한 구절, 한 자 한 자의 의미를 되새기며
현실의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내면의 생명력을 발견했던 것이다.

○관음경의 구성과 내용○

《관음경》은
법화경 제25품 <관세음 보살 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을
단독경으로 분리하여 부르는 명칭이다.
일승 묘법(一乘妙法),구원 본불(久遠本彿),보살 행도(菩薩行道)의
진리를 설하는 법화경의 후반부에 속하는《관음경》은
그 구성상 장행으로 이루어진 본문과 5언 4구의
계송(계頌) 26수로 이루어져 있다.

본 경의 서두는 무진의 보살(無진의보살)이 부처님께
관세음 보살이 무슨 인연으로 관세음이라고
불리게 되었는가라고 명호의 유래를 묻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이름을 묻는다는 것은 바로 그 이름을 가진
대상의 존재를 묻는 것이다.
관심의 존재를 알고있다면 대상의 존재를 묻는 것이다.

관음의 존재를 알고 있는 부처님은 답변한다

"선남자여, 만약 무량 백천만 억의 중생이 있어서
갖가지 괴로움을 받을 때 관세음 보살의 명호를 듣고
일심(一心)으로 부르면 관세음 보살은 곧
음성을 두루 관(觀)하고 모두 해탈을 얻게 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관음 신앙의 대전제이다.
우리가 고난이나 번뇌에 아무리 찌들어 있더라도
관세음 보살의 명호를 일심으로 부르면〔一心 名〕
관세음 보살은 그 음성을 관하고
모두 해탈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있다.
관세음 보살의 명호를 일심으로 부른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오직 일념으로 자기의 모든 존재를 바쳐
관세음 보살의 지혜와 자비를 자기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심 칭명은 곧 자기 정화의 행법이며
대승 불교의 귀결점인 불이(不二)의 전일성(全一性)을 체험하는 것이다.

관세음 보살을 오직 일념으로 부르는 동안
어떠한 고난이나 번뇌에 의해서도 오염되지 않는
자기 자신의 참생명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무진의 보살의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은 계속된다.

나찰, 아귀와 같은 악귀로 인한 재난과 보배를 얻기 위해
험한 사막을 여행할 때의 고난도 관세음 보살을
일심 칭명하면 관세음 보살의 위신력으로 벗어날 수 있다고 설한다.

현대의 우리는 《관음경》에서 설해지는 나찰, 악귀 등을
"그럴 리가... ... 상상의 존재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상상은 현실보다 값질 때가 있다.
우리의 내면에 나찰, 아귀와 같은 어두운 면이
음습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생각해보라.
인간의 상상력은 모든 것을 만들어 낸다.
상상이 바로 현실로 바뀌는 것이다.
단지 시간이 문제일 뿐이다.

《관음경》에서 설해지는 인간의 실존적인 고통은 아주
다양한 동시에 모든 시대의 인간이 겪는 보편적 고통이다.
그리고 아주 현실적인 괴로움을 그려낼 뿐 아니라
관음 신앙이 지향하는 실제적인 수행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만약 어떤 중생이 음욕이 많더라도 항상 관세음 보살을
공경하고 명호를 부른다면 곧 음욕에서 벗어나게 되리라.

만약 어떤 중생이 분노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항상 관세음 보살을 공경하고 명호를 부른다면
곧 분노에서 벗어나게 되리라.

만약 어떤 중생이 어리석더라도 항상 관세음 보살을 공경하고
명호를 부른다면 곧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되리라."

불교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번뇌를 위해서 설해진 바와 같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세 가지를 들수 있으며
이것을 세 가지 독약 삼독 이라고 설한다.

그렇다면 아무리 불교 사상에 정통하고 고된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 삼독을 소멸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탐진치 삼독은 얼마나 뿌리깊고 질긴 번뇌이던가?
우리가 죽음에 이르러서도 결코 풀리지 않을
삼독의 그물은 사상의 탐구나 한때의 수행으로
소멸할 수 있는 번뇌가 아니다.

다만 《관음경》이 지향하는 바와 같이 자신의 죄업과
무력함을 뼈저리게 자각하고 자기 존재를 내던져서
구원을 간절히 열망하는 인간 구원의 신앙이 있어야
번뇌는 우리에게서 그 얼굴을 돌릴 것이다.

그러므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일심으로 부르는 것 자체가
자기 정화의 길인 것이다.
또한 자기를 완전히 비우는 대원경지의 길이기도 하다.

의상 대사의 경우를 보자.
화엄경의 진수를 체득한 당대 최고의 학승인 그는
당나라에서 귀국하자마자 당시로서는 황량했을
낙산 해안을 찾아가 관세음 보살을 친견하기위해
목숨을 건 기도를 하고
백화 도량 발원문(白幻楊撥願文)을 쓰지 않았는가?


본사이신 관세음 보살님은 저 하늘 밝은 달이
강물마다 비치듯 묘한 작용 다함없는 장엄 상호 갖추시고
어리석은 이 제자는 허망한 몸과 모습에 부질없이
집착하여 마침내는 무너질 몸에 매여 살아갑니다.

이루어진 이 육신가 의지하여 사는 국토의 깨끗하고 더럽고
즐거웁고 괴로움이 저 성인과 이 제자는 가각 서로 다릅니다.

백화 도량 발원문의 한 구절이다.
우리는 이 발원문에서 사상의 탐구에 누구보다도 높은 길을
걸어 갔던 의상이 품었던 인간 구원에의 열망을 읽을 수 있다.

경전은 33가지의 몸을 사바 세계(娑바世界)에 나투어
중생들의 서로 다른 근기에 맞춰서 설법하고
제도하는 관세음 보살의 공덕을 설한다.
33가지의 변화신 가운데는 부처, 성문, 범왕, 자재천,
바라문,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등이 망라되어 있다.

관세음 보살은 필요하다면 부처님의 모습을
빌릴 수도 있으며 세속의 남녀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관음 영험을 살펴보면 관세음 보살은 실제로
다양한 구원자의 모습을 보여죽고 있다. 이점이 중요하다.

우리는 고정 관념의 틀에 사로잡혀 자신이 정한
치수대로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잰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만나도 진정한 만남이 없다.

종교적 구원에 있어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바로 만남이다.
그런 의미에서 《관음경》은 만남의 경전이며
관세음 보살은 만남의 보살인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지 않고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들어준다면 이야말로
관세음 보살을 따라 배우는 수행인 것이다.

《관음경》의 후반부는 전반부의 내용을
5언 4구의 게송 26수로 요약하고 있다.
이 요약은 단순한 요약이 아니라 매우 간명하면서도
우아한 미문(美文)이다. 특히
소리내어 독송하면 운율이 저절로 느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구원의 신앙,
만남의 의미를 설하는《관음경》은 천년 이상 불교도들이
애송하는 경전이 되었으며 끊임없이 서사(書唆)되어온
가장 친근한 대중의 경전이었던 것이다.
이상으로 《관음경》의 구성과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관세음 보살은 어떤 보살인가.

○관세음보살의 의미○

우선 관세음보살이라는 명호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관세음 보살은 범어 Avalokiteesvara의 역어이다.
즉 "세간의 고통스러운 소리를 관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이다.
대승 불교에서는 인간의 슬픔 가장 친근하게 어루만져 주는
자비의 보살, 관세음 보살은 천수 천안(千手千眼)의 보살이라고
불릴 만큼 무한한 방편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중생들의 바람이 얼마나 많았으면 관세음 보살을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갖춘 보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그만큼 관세음 보살은 대승 불교가 갖은
인간 구원의 열망을 잘 대변하구 있는 것이다.


○관세음 보살의 이근 원통(耳根圓通)○

<능엄경>에서는 관세음 보살의
이근 원통(耳根圓通)이 설해지고 있다
(의상 대사의 관음성지 낙산사의 큰법당은 바로 원통 이다).

<능엄경> 제6권에서 관세음보살은 자신이
해탈을 얻게된 수행법이 바로 이근원통이라고 소개한다.
이근원통이란 음성을 도구 삼아 말하고 듣는 것으로
가르침을 전하는 사바세계의 교체(敎體)를 깨달은 것을 가르킨다.

그리고 관세음 보살은 항하 사겁 전에 관세음 여래라는
부처님으로부터 이근 원통의 수행을 교시받았다고 한다.
관세음 보살은 이근 원통을 성취했으므로
중생의 신음 소리를 가장 잘 듣고 해탈로 이끄는
보살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이다.
이와같은 관세음 보살의 이근 원통을 다음의 게송은 잘 표현하고 있다.

返聞聞性梧圓通 觀音不暘觀音
上同慈力下同悲 三十二
(듣는 성품 돌이켜 들으시옵고
이근 원통 뚜렷이 깨치시었네
관음불이 관음보살 이름 주시고
크신 자비의 힘을 두루 전하셔서
서른 둘의 걸림없는 변화의 몸은
온누리의 낱낱 티끌 세계에 두루하네)

불자들이 조석의 예불이나 법회 때 독송하는
<반야 바라밀다 심경>의 서두는
"관자재 보살 행심 반야 바라밀다 시
(觀自在菩薩行沈般羅波羅蜜多時)"라고 시작된다.
이처럼 반야계 경전에서는 관세음 보살이
관자재 보살(觀自在菩薩)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관세음 보살과 관자재 보살은 그 의미가 어떻게 다른 것인가.
관세음 보살 이라는 말에서는 자비가 강조되고 있으며
관자재 보살이라는 말에서는 지혜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관음경>의 번역자 구마라집(鳩滅什)은,
지혜가 강조되는 관자재 보살보다는 중생의 구원자로서
"세간의 고통스러운 소리를 관하여 제도하는 보살",
즉 자비가 더욱 강조되는 관세음 보살이라고 옮기고 있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법화경>이 그토록 오랫동안 유통 되어온
이면에는 이와같은 종교적 배려가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 한국 불교가 가장 오랫동안 신앙해온
보살은 바로 관세음 보살이다.
널리 독송되는 천수경(千手經) 또한 원래 명칭은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에대비심대다라니
(千手千眼觀自在菩薩광大원만無에大非心大다羅尼>이다.
천수경이 대중 염불로 토착된 경우처럼
<관음경(觀音經)>은 바로 우리 나라 불교의
관음신앙을 가꾸어 온 인간 구원의 경전인 것이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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