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공부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부처님이야기 ─설법.교화(8)

관리자 | 2007.04.09 10:08 | 조회 988
설 법 교 화 중생의 편에 서다 (1) 깨달음을 성취하신 부처님께서 곧바로 중생의 교화에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깨달음의 내용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그것을 중생들이 알기 쉽게 조직하고 체계를 세우시느라 시간이 필요하셨으리라 생각된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연기법을 제자들에게 설하실 때는 전혀 다른 교리적 체계를 가지고 나타나는 것을 보아도 그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즉 연기하는 법의 내용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때에는 그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일상적인 삶에 적용하여 다른 교리적 조직으로 보이셨음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이 소위 사성제였다. 이러한 부처님의 심정을 나타내는 불전을 살펴보기로 하자. "내가 깨달은 법은 깊고 깊어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오직 깨달은 이와 깨달은 이들끼리 알 수 있는 것이다. 오탁 악세에 살고 있는 중생들은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과 사견, 아첨과 교만 등으로 마음이 덮혀있어 지혜가 없고 복력이 적다. 어떻게 해서 내가 깨달은 법을 전한다 해도 저들은 어리석어 믿고 받아들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헐뜯고 비방하여 삼악도에 떨어져 많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내 차라리 침묵을 지켜 반열반에 들어야겠다." 깨달음을 성취하신 다음 다시 한번 맞이하게 되는 갈등이었을 것이다. 최고의 정신적 영역에 도달하신 성자께서 필연적으로 느끼게 되는 또 하나의 고독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적할 사람이 없고 동등한 사람도 없다.' 라고 술회하셨던 것처럼 애써 깨달은 자신의 심정을 말해 주어도 알아들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고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 하나의 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이제까지 인도의 전통적인 사상과 철학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었던 신화 속의 창조주 범천이 부처님 앞에 나와 무릎을 끓고 귀의하는 사건이었다. 문학적 표현을 빌리고 있으나 이것은 전통이 새로운 사상 앞에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심에 주저하자 범천이 내려와 중생을 위하여 바른 법을 설하실 것을 간절히 청하는 장면이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범천의 권청(梵天勸請)이라 말한다. “세존께서 법을 설하시지 않으신다면 이 세상은 망하고 말 것입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원하옵건대 세존이시여, 근기에 맞게 법을 설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중생들이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시옵소서.” “내가 이미 얻은 법은 깊고 깊어 알기 어렵다. 참으로 고요하고 번뇌가 없어 최상의 미묘한 법이다. 지혜로운 사람들이나 알 수 있는 것이지 어리석은 자들이 익힐 것이 못 된다. 중생들은 보는 견해가 다르고, 근기가 다르며, 하고자 하는 것이 다르며, 생활이 다르다. 다른 생각에 의지하고 자기들 좁은 소견에 빠져 있어 이 연기법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이 법을 알아 얻은 열반은 더욱 알기 어렵다. 내가 지금 이법을 설하려 하나 남들이 알지 못하면 나에게 피로와 괴로움만이 있을 따름이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덮혀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진리를 안다는 것은 이 세상의 흐름을 거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욕심에 매달려 있고 어리석음에 덮혀 있는 사람에게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중생들은 우둔하고 어리석음에 매달려 눈먼이와 같아 생사의 흐름을 따르고 있어 그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가 없으니 저들을 어떻게 제도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범천은 부처님께 두 무릎을 꿇고 합장하여 더욱 간절히 청하였다. “세존이시여, 한량없는 세월동안 널리 덕본을 닦으시어 이제 정각을 이루시고서 어찌하여 침묵만을 지키시고 법을 설하시지 않으십니까? 중생들이 어리석음 때문에 생사의 흐름에 떠밀려 흐름을 벗어나기는 실로 어렵사오나, 그래도 과거 생에 선지식을 가까이 하여 덕행을 좀 쌓은 인연으로 지금 큰 법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만을 위해서라도 자비를 내리시어 법을 설하시고 그들이 악행을 멀리하고 선법을 이루게 하시옵소서.” 범천은 중생세간이 번뇌망상에 뒤섞여 있고 청정하지 못하다 하지만 불타의 깨달음이라는 것도 그러한 번뇌망상 가운데서 나온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법을 설하기를 바랐다. 이러한 범천의 청을 듣고서 깨달음의 밝은 지혜로 중생세간을 살피시게 되었다. 중생들은 근기가 각기 다르므로 가르치기에는 쉽고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래의 죄가 두려워 악행을 버리고 선법을 성취할 사람도 있음을 아셨다. 그것은 마치 연꽃이 물위에 솟아있는 것, 수면에 닿아 있는 것, 아직 물 속에 잠겨 있는 것의 차별은 있으나 이 모두가 흙탕물에 물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여서 쉽게 꽃이 필 수 있는 것처럼, 중생도 마찬가지임을 살피시고 법을 전하려는 뜻을 선포하셨다. “범천아, 내 너에게 이르노니, 이제 감로의 문은 열렸다. 듣는 사람 모두가 믿고 받들어라. 망설이는 사람을 위하여 설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이렇게도 전하고 있다. “내 너희들을 불쌍히 여겨 여기 감로의 법문을 열리라. 이 법은 깊고 미묘하여 이해하고 알기는 어려우리라. 이제 믿고 받들어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설하는 것이지 두려워하여 보탬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설하는 것이 아니다.” 법을 전하고자 하는 뜻을 굳히셨으나 어렵다고 생각되었던 이 법을 누구에게 먼저 설해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를 살피게 되었다. 전날 출가하여 수행할 때 만났던 바라문의 철인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다를 교화의 첫 번째 대상으로 떠올렸다. 그들이라면 지혜가 있어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였다. 그들과 이미 헤어질 때 도를 먼저 이루면 자기들을 먼저 제도하여 줄 것을 부탁 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알라라 칼라마는 이미 7일전에 세상을 떠났고, 웃다카 라마풋다는 바로 어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한때 자기와 동료가 되어 고행을 하였던 카필라성의 청년 수행자인 교진여등 다섯 사람을 교화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들은 코살라국의 바라나시(베나레스)에서 여전히 고행을 하고 있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곳은 마가다국의 왕사성 근처 부다가야였으니 바라나시와는 상당히 먼 거리였다. 그 거리는 250키로나 되었다하니 6백리 이상이나 떨어진 것이다.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누구와도 말벗할 상대가 없어 고독함을 술회하신 적이 있었다. “사람이 우러러 공경하는 마음이 없고, 받들어 모실 사람이 없으며, 가르침을 받을 수가 없으며, 두렵고 꺼릴것이 없어서 자기의 뜻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받들어 섬기며 그 뜻을 따르고 거역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하나의 기쁨이다. 그러나 천상에서나, 인간에게서나, 범천이나 마군, 사문이나 바라문,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생류도 나보다 뛰어나 내가 섬기고 의지하며 공양하고 공경할 만한 이를 찾아 보아도 도대체 찾을 수가 없구나. 이제 나는 오직 내가 깨달은 법이나 의지하고 받들어야 하겠다.” 이러한 술회를 보아도 부처님께서 법을 전하신다는 것은 적극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멀리 떨어져 있는 다섯 사람을 찾아 여행길을 떠나게 되었다. 다섯 사람을 찾아 바라나시로 가시던 중, 한 바라문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던 범지(梵志) 우다야를 만나게 되었다. 멀리서 걸어오는 불타의 모습은 너무도 거룩하고 얼굴에는 법열에 가득한 기쁨이 넘쳐 보는 사람들이 환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다야도 그러한 불타의 모습을 보고 물었다. “사문 고타마시여, 당신의 스승은 누구이시며, 당신이 배우고 있는 것은 어떤 법입니까?” 이러한 우다야의 질문에 불타는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모든 지혜에서 뛰어났고 모든 욕심과 애착에서 해탈하여 스승없이 스스로 깨달았으니 어떤 사람을 따라서 배우겠는가! 나에게는 스승이 없고 또 나와 같은 사람도 없다. 이 세상에는 오직 한 사람의 깨달은 이가 있어 마음이 고요하여 항상 평화롭도다. 나는 이 세상에 집착할 것이 없어 이 세상에 우뚝 솟아 있다. 천상에서나 인간에서나 나와 겨룰 자가 없다. 나는 바라나시로 가서 위없는 법을 전하고자 하노라. 어둠의 세상속에 감로의 북을 울리리라.” 이러한 게송을 들은 우다야는 의심이 생겼다. “스스로 최고라고 말하니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일체의 속박을 벗어나 삼계의 번뇌를 다 끊어버렸다. 이 세상의 모든 악법을 꺾었으니 나는 최고라고 말한다.” 그러나 외도였던 우다야는 불타의 심상치 않음에 눈을 뜨지 못하고 가버리니 법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스스로 지나쳤다. 이것을 인연없는 중생이라 말한다. 여러날이 걸려 바라나시에 도착하였다.    * 용화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4-07 14:09)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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