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공부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경전비유설화─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

관리자 | 2007.01.31 07:50 | 조회 698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


‘영원한 생명’ 집착 어리석어
일체중생은 죽음으로 돌아가
웰빙보다 웰다잉에 관심갖고
생전에 부지런히 선업 쌓아야

부처님이 사위국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독실한 재가불자인 파세나디 왕이 외출한 사이에 왕의 모후가 임종을 했다. 왕에게는 불사밀(不奢蜜)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그는 왕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꾀를 냈다. 500마리의 흰코끼리와 말, 500명의 보병과 기녀, 500명의 바라문과 사문, 500벌의 의상과 보배를 장엄한 화려한 상여를 꾸몄다.

외출에서 돌아오던 왕은 이 화려한 행렬을 보고 신하에게 누구의 행렬인지 물었다. “어떤 장자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저것들을 염라대왕에게 보내 죽은 이의 목숨을 대신하려고 보내는 행렬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미련한 짓이다. 코끼리와 말을 대신 희생한들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다. 바라문과 사문들이 빌어도 안 되고, 기녀를 보내 달래도 어림없다. 군사를 보내 싸워도 안 되고, 보물로 뇌물을 써도 안 될 일이다.

태어난 사람이 죽지 않을 방법은 없다. 슬퍼해도 소용없다.” 대신은 그때서야 왕에게 모후의 죽음을 알렸다. “실은 오늘 모후께서 임종했습니다. 태어난 사람은 모두 죽는 것이니 너무 슬퍼 마옵소서.” 왕은 슬픔을 누르고 궁으로 돌아가서 절차에 따라 장례를 치루고 부처님을 찾아갔다.
부처님은 파세나디 왕을 위로하며 이렇게 말씀했다. “왕이여. 일체중생은 다 죽음으로 돌아가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소.

사람의 몸은 눈덩이나 흙덩이를 뭉쳐놓은 것 같아서 반드시 부서지게 돼 있소. 아지랑이 같아서 허망하고 진실한 것이 아니오.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빈주먹으로 어린애를 속이는 것과 같소.
그러니 이 몸을 믿지 말고 근심도 하지 마시오.” 부처님은 또 이렇게 죽음의 불가피성을 말씀했다. “죽음은 교묘한 말이나 주술이나 약이나 부적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오.

늙음은 청춘을 부수어 아름다움을 없애고, 병은 건강을 부수고, 죽음은 목숨을 부수고, 항상하다고 믿는 모든 것은 덧없음으로 돌아가는 것이오.
대왕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소.
그러나 이런 것을 미리 알고 몸과 마음을 다스려 법을 깨닫게 되면 죽은 뒤에 천상에 태어나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오.”

      증일아함 18권 사의단품(四意斷品) 제7경


언제부턴가 우리들은 웰빙(Wellbeing)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웰빙의 관심은 한마디로 어떻게 해야 잘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웰빙은 매우 종교적인 화두다.
그런데 우리의 웰빙은 상업주의와 결합해 엉뚱한 쪽으로 발전했다.
황토방에서 생활하며 자연식을 먹는 것을 웰빙이라고 생각하는 식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산다고 진정으로 행복해질지는 의문이다.

우리 앞에는 언제나 죽음이 복병처럼 엎드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고민해볼 점은 잘사는 것 못지않게 잘 죽는 것이다.
죽음은 누구나 두렵고 피하고 싶지만 아무도 이를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잘 죽는 일(Welldying)’이야말로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져야할 주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잘 죽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주기 위한 것이 일부 사찰에서 하는 ‘죽음체험학교’라는 프로그램이다.
내가 오늘 죽는다고 가정한 뒤 유서도 써보고 관속에도 들어가 보는 것이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일도 미리 정리하게 한다.
이렇게 하다보면 지난날을 반성도 하게 되고 남은 시간을 정말로 잘살겠다고 다짐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번 해볼 연습이 아닌가 싶다.

                   홍사성 불교방송 * 용화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4-07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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