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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귀의의 교리적 해석

관리자 | 2006.08.04 03:23 | 조회 1176


 

       삼귀의란 무엇인가

“불법승 삼보는 불자가 귀의해야 할 대상” 인간은 원래 사회적 존재요 연기적 존재이기에, 누구나 예외 없이 이웃과 사회, 자연과 우주에 의지하며 살아간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정신적으로도 무엇인가를 의지하며 살아가게 마련이다.

정신적 의지처가 없는 사람은 부평초처럼 불안과 방황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도 잡아함 〈존중경〉에서 “의지하고 존중할 대상이 없는 사람의 생활은 괴로움이다.”라고 말씀하셨으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고 존중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과 쾌락, 명예와 권력을 소중히 여기며 이것에 의지해 살아간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결국 월터 스콧트 경의 표현처럼 ‘숲 속 나뭇잎의 아침이슬과 같고 흘러가는 강물 위의 물거품과도 같은’ 실로 덧없는 것이요,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꿈과 같고 그림자와도 같은’ 참으로 부질없는 것이다.

돈과 쾌락, 명예와 권력은 우리의 영원한 의지처가 될 수 없으며 정신적 존중과 공경의 대상은 더더욱 될 수 없다. 오늘날처럼 모든 권위가 붕괴된 시대에서는 존중의 대상을 찾기란 매우 힘들다. 설혹 그러한 대상을 찾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실과는 거리가 먼, 거짓된 것이라면 우리는 더 큰 공허 속에 함몰되고 말 것이다.

불교인들은 부처님 재세시 때부터 세 가지 보배, 즉 삼보에 귀의하였으며, 그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삼귀의는 불교인이 되는 첫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 의례이며 규범이다.

그래서 삼귀의를 삼귀의례 또는 삼귀의계(三歸依戒)라고도 하는 것이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는 삼귀의례를 일반적으로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우리말을 가사로 하여, 칠음계에 의한 서양음악 또는 찬송가풍의 노래로 한다.

하지만 전통적으로는 “귀의불 양족존. 귀의법 이욕존. 귀의승 중중존”이라는 한문 가사를, 범패 가락으로 합창하기도 하고 선창 후창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하였다.

귀의불 양족존(歸依佛兩足尊)이란,
두 다리(兩足)를 가진 존재 즉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존귀한 분인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의미이지만, 흔히 복덕과 지혜 두 가지를 모두 구족하신(兩足) 존귀한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귀의법 이욕존(歸依法離欲尊)이란,
욕심을 떠나 여읜 존귀한 부처님의 교법, 다시 말해 참다운 진리의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의미이다. 부처님의 교법은 객관성과 보편성, 세계성과 영원성을 지닌 진리여서 모든 사물과 존재에 두루 평등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사사롭고 개인적인 욕심을 떠나 있다는 의미에서 이욕(離欲)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욕심이야말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거부하고 무시하고 역행하는 당체임을 상기한다면 부처님의 교법을 이욕존이라고 표현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고 하겠다.

끝으로 귀의승 중중존(歸依僧衆中尊)이란,
수많은 중생의 무리 가운데서 가장 존귀한 스님들에게 귀의한다 또는 수많은 집단과 단체 가운데서 가장 존귀한 불교 교단(僧伽) 즉 불교공동체에 귀의한다는 의미이다.

재물.명예.권력에 매달리면 ‘허망’ ‘삼귀의’는 불자가 되는 첫째 조건 그런데 이 삼귀의례를, 남방불교권에서는 세 번 반복해서 팔리어(Pali)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상강 사라낭 갓차미

두띠얌삐 붓당 사라낭 갓차미
두띠얌삐 담망 사라낭 갓차미
두띠얌삐 상강 사라낭 갓차미

따띠얌삐 붓당 사라낭 갓차미
따띠얌삐 담망 사라낭 갓차미
따띠얌삐 상강 사라낭 갓차미

“붓당 사라낭 갓차미(Buddham saranam gacchami)”의 의미를 살펴보면,
‘붓다’는 부처님, ‘사라나’는 귀의 또는 귀의처, ‘갓차미’는 내가 간다는 뜻으로서, 결국 이것은 “제가 이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혹은 “제가 이제 부처님이라는 귀의처로 나아갑니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담망 사라낭 갓차미”는 “제가 이제 담마(法)에 귀의합니다”라는 뜻이며, “상강 사라낭 갓차미”는 “제가 이제 상가(僧伽)에 귀의합니다”라는 의미이다.

두띠얌삐(dutityam pi)는 ‘두번째도 또한’이라는 의미이고, 따띠얌삐(tatiyam pi)는 ‘세번째도 또한’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말 삼귀의와 팔리어 삼귀의의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스님들’과 ‘상가’의 차이이겠는데, 상가의 중심 구성원이 스님들이라고 보면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스님들’의 본래적 개념이 ‘상가’라는 사실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의지하고 존중해야 할 것은 진리요 진실이다. 설혹 그것이 일시적으로 우리에게 시련과 고통을 준다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우리를 이롭게 한다. “맛있고 향내나는 미끼 아래 반드시 고기가 죽어나간다”는 말처럼, 진실이 아닌 달콤한 미끼를 우리는 항상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미끼는 반드시 우리에게 재난과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진실과 진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삼보에 대한 귀의의 마음을 더욱 굳건히 다져가야 할 것이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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