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中道)란? – 중간, 중용과 어떻게 다른가?
중도란 <중간 길> 또는 좌우에 치우치지 않는 <한 가운데>라는 식의
중간주의나 타협적인 중용(中傭)이 아닙니다.
중도의 <중(中)>이란 팔정도의 <정(正)> 즉 <바른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실제 인간생활에 적용되는 요긴한 도리로서, 공리공론(空理空論)이
아닌 정도(正道)를 말하는 것입니다.
좌,우 중간할 때의 중간은 좌,우에 대한 위치적인 처지를 말하지만
중도의 중은 그런 고정적인 위치에서 벗어난 좀 더 자유로운
자연성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있는 그대로 보되
걸림(선입견, 편견 등)이 없는 상태입니다.
석존은 다섯 비구들에게, 「나는 쾌락도 고행도 무익하고 하등한
것이어서 다 버렸으며, 두 극단을 버림으로써 중도를 깨닫게
되었고, 중도를 깨달음으로써 인간세상의 일들을 바르게 통찰하고
바르게 인식하는 눈을 뜨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석존이 깨달은 연기의 법, 무상, 무아 등은 모두 이
<중도의 눈>으로 관찰한 결과인 것입니다.
연못의 진흙은 결코 깨끗한 것은 아닙니다. <더러움>입니다.
반면에 백련(白蓮)은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답고 순백한
<깨끗함>입니다. 이 더러움과 깨끗함은 극히 대조적입니다.
그러면서도 연꽃은 이 더러움 속에서 피어납니다.
진흙과 연꽃과는 서로 양극을 이루지만 사실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 즉 불이(不二)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대립적인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는 생 - 사, 승 –
패, 정 - 부정, 독 - 약, 선 – 악, 더 나아가 나 – 너라는
것은 모두 둘이 아닌 하나이며 다만 인간이 이를 둘로 갈라서
차별을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도의 <중>은 둘이 아니라고 보는 눈(觀)인 것입니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은 중도가 아닙니다.
선, 악도 역시 그렇습니다.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과 연에
따라 선인도 되고 악인도 되는 것입니다.
사성제 중의 고제 – 고도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 까닭도,
이 고가 있음으로써 극복의 길을 찾을 수 있고 또 고가
있음으로써 낙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락도 하나입니다.
모든 것을 고정적으로 또는 집착해서 보는 것은 중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번뇌가 곧 보리(깨달음)라고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