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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수보리 란?

관리자 | 2006.08.11 11:18 | 조회 1322

       
  수보리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원정사에서 큰비구들 1천2백50명과 함께 계시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공양하실 때가 되어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들으시고 사위성에 들어가시어 걸식하시었다..."로 시작되는 《금강경》. 불자들이 애송하는 경전 중의 하나인 《금강경》은 바로 수보리 존자의 질문으로부터 비롯된다.

수보리 존자는 《금강경》에서 공(空)사상을 설하는 부처님과의 대화자로서 등장한단. 부처님께 질문에 질문을 거듭해 우리들에게 삼라만상의 실상을 깨쳐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큰아버지가 보시하고 그가 처음 부처님을 뵈었으며 스스로가 출가한 기수급고독원을 배경으로. 범어 이름은 수부티다. 수보리 존자는 《금강경》의 '제2분 선현이 법을 청하다'의 첫 대목부터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때의 선현이란 수보리 존자를 가리킨다.

어느 경전이고 등장인물은 그 경전의 내용과 깊은 연관이 있게 마련이다.
공과 무상의 도리를 확연히 깨닫고 있는 수보리 존자가 《금강경》에 등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셈이다. 본래는 탁발제일이라 불렸다.
그러나 뒤에 반야경전들이 수보리 존자를 해공제일의 부처님 제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두루 공하다는 이치를 터득해 그것을 해명하는데 으뜸이었다.
공과 무상의 도리를 가장 잘 깨달은 분이었기 때문이다. 반야사상의 원조로 꼽히고 있다.
후대 반야부 경전에서는 언제나 수보리가 공의 지혜인 반야바라밀을 설하고 있다. "그때 장로인 수보리 존자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쪽 어깨에 옷을 벗어 메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 합장하여 공경히 부처님께 아뢰었다.." 《금강경》에서 그의 첫 질문은 이러하다.

"부처님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고는 마땅히 어떻게 안주하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 해공제일인 수보리 존자인만큼 부처님의 뜻을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보리 존자는 중생들의 궁금증을 헤아려 부처님께 여쭙고 있다.

장로 수보리라고 지칭되던 것이 《금강경》제21분에 이르면 혜명 수보리라고 부르게 된다. 이례적인 수식어다. 지혜를 목숨처럼 여기는 수보리 존자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도 공의 도리를 잘 아는 그인지라 미래세에 대해서도 남다른 식견을 갖고 있다는 의미로 보아진다.

어떤경명에서는 부처님과 거의 동등한 상태에서 대화에 들어간다는 것을 혜명이라는 존칭을 통해서 드러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증지부경전》에서는 은중제일, 무쟁제일이라고도 불린다.
조용히 삼매를 닦았기에 은중제일이었으며 결코 남과 논쟁하지 않는 분이기에 무쟁제일이란 이야기이다. '내가...'라는 강한 생각을 지니고 사는 우리들과는 달리 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타인들과 마음을 열고 생활한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처럼 대립하지 않고 갈등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증일아함경》제2제자품에선 "행이 본래 청정하여 항상 공정을 즐기고 공의 뜻을 분별하여 공적의 미묘한 덕업에 뜻을 두는 이"로 묘사하고 있다.
《아라한구덕경》에서도 항상 보시를 행하며 공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으뜸이라고 했다. 수보리 존자는 코살라국 사위성 장자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큰아버지는 부처님께 황금을 깔아서 기타 태자의 숲을 기증한 수닷타장자입니다. 그로써 기타 태자의 숲은 기원정사가 된다.

다시 말하면 수닷타 장자의 조카가 수보리 존자라는 이야기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퍽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처님께서 코살라국을 처음 찾아오시던 날, 수보리 역시 기원정사에서 부처님과 첫 만남을 갖는다.
부처님의 설법을 접한 수보리 존자는 그 자리에서 귀의해 불제자가 된다.
엄청난 감동의 자리였으니 가능한 일이었겠다.

《증일아함경》제28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지 8년 뒤에 돌아가신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하늘에서 석 달간 설법을 하고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신 일이 있었다. 이때 여러 국왕과 제자들이 환영예배를 올렸다.

그러나 수보리 존자 홀로 고요히 명상에 잠겨있었다. "지금 환영 예배하려는 부처님 형상은 무엇인가.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를 말하는 것인가? 지ㆍ수ㆍ화ㆍ풍을 말하는 것인가? 이 같은 설법은 모두 공적한 것이니 나도 없고 사람도 없고 작용도 없으며 모양도 없고 가르침도 없다. 모든 법은 공적하니 나는 이제부터 참된 법에 귀의하겠노라."

이때 연화색 비구니 스님이 신통력으로 제일 먼저 부처님께 환영예배를 올립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선 연화색 비구니 스님에게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수보리 존자가 모든 법이 두루 공함을 보고 제일 먼저 예배해 맞았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참된 예불이란 공을 알고 해탈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모두가 부처님의 육체적인 모습에만 집착해 있을 때 수보리 존자는 그러한 집착을 떠난 초월적인 자유의 경지, 즉 공의 경지에서 부처님을 뵈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를 해공제일이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이유라 하겠다. 부처님의 마음은 달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마음먹기에 따라 찬란히 빛을 발하는 것임을 수보리 존자가 깊이 통찰했던 것이다. 이런 일화도 전합니다.

수보리 존자가 물처럼 구름처럼 만행의 길을 다가 왕사성에 닿았다. 당시 마가다국에 신심 깊은 빔비사라왕이 수보리 존자가 왔다는 소식을 듣는다.
왕은 덕망 있는 스님께 정사를 지어 드리겠노라는 약속을 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토굴을 지어 수보리 존자에게 기증을 하였다.

그러나 다른 나라와의 병합에 전념하던 때라 빔비사라왕은 토굴의 지붕 올리는 일을 깜빡 잊고 말았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비가 잦은 인도땅에서 지붕 없는 집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수보리 존자는 감사히 그 토굴에 머물면서 수행정진에 임했습니다. 불가 수행자의 가풍이란 본래 어떤 공양물이든 탓하거나 분별하지 않고 감사히 받는 것이 기본이지요. 그런데 수보리 존자가 그 토궁에 머문 뒤 왕사성 일대에 비라고는 내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지붕 없는 토굴에서 수행 정진하는 수보리 존자에 감복한 하늘 탓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농민들은 가뭄에 큰 고생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비가 오지 않는 이런저런 이유를 따져 보던 차에 수보리 존자의 토궁에 지붕이 없음을 알게 되었죠. 왕은 자신의 실수를 사과하고 새롭게 지붕을 해올렸다고 합니다.

이때 수보리 존자가 읊었던 시가 다음과 같이 《장로게경》에 전합니다. 나의 토굴이 완성되니 소란한 주위가 고요하고 마음이 평화로우니 여기가 바로 깨달음의 자리라네. 하늘이여, 비를 내려 주오. 나는 진리를 찾았거늘 비를 내려 주오. 지붕이 만들어진 직후에 왕사성에선 단비를 만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붕 없는 토굴을 공양받아도 즐거이 살던 수보리 존자. 그래서 그를 부를 때 피공제일이라고도 부릅니다. 누구보다 불제자들의 공양을 후하게 받는 사람이라는 의미기도 할테지만 어떤 면에선 공양을 받을 때 가장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는 분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증일아함경》중에 이런 내용이 전합니다. 왕사성 기사굴산 기슭에 머물 때의 일인데요. 수보리 존자는 당시 병들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지금 내가 받는 이 고통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며 어떻게 사라지는 것인가'라고 되묻고 있었습니다. 마침 제석천이 5백 명의 천인(天人)과 음악의 신인 파치순을 데리고 수보리 존자를 위문하려 왔습니다.

제석이 다가와 고통이 어떠한가를 물었을때 수보리 존자는 이런 가르침을 들려줍니다. "....탐욕의 병은 더럽다는 생각으로 다스리고 성냄의 병은 자비심으로 다스리며 어리석음의 병은 지혜로써 다스린다.

이와 같이 일체의 소유는 모두 공으로, 나도 없고 남도 없으며 수명도 없다... 바람이 큰 나무를 쓰러뜨려 가지와 잎사귀를 마르게 하고 우박과 눈이 꽃과 열매를 망치기도 한다.... 이처럼 법과 법은 서로 어지럽히다가도 서로 안정시킨다.
나의 고통도 지금은 다 사라져 심신이 편안하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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