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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중생 실유불성 이란?

관리자 | 2006.09.01 10:32 | 조회 1020


        일체중생 실유불성 이란?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란 이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부처님이 가르쳐준 인격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이 룸비니 꽃동산에서 태어나면서 외친 것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인데, 이것은 위의 '일체중생 실유불성'과 그 사상적인 맥락이 같다.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높고 존귀롭다.' 이것은 듣기에 따라서 무척 교만한 말로 들릴 수도 있으나 그것은 모든 생명의 보편성을 의미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격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서 평가절하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생명의 영원성, 그리고 모든 생명에게 불성(佛性)이 잠재해 있다고 하는 것을 모든 중생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열반경》속에서는'불신상주(佛身常住)'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이와 같은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라는 위대한 선언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나는 부처일까?' 이제 《법화경》에 나오는 비유중에서 하나를 인용하면서 이 논의를 보다 깊이 있게 합리화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사자 새끼 한 마리가 어렸을 때 길을 잃고, 양의 젖을 먹고 성장하게 되었다. 그 사자는 물론 양 인줄로만 알고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사자가 가지고 있는 용맹성이라든지, 백수의 왕으로서의 면모보다는 양들처럼 꼬리를 감추고 자기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되는 동물들, 즉 이리나 늑대 등에게 쫓겨서 도망 다니기가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미양의 밑을 벗어나서 커다랗게 기지개를 펴고 한번 크게 고함을 질러 보았다. 그랬더니 다른 모든 생명들, 여태까지 그토록 무서워했던 대상들이 모두 자기를 두려워하고 멀리 도망가는 것이었다. 그때, 이 사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 내가 사자인가 보다. 그렇지 않고서는 다른 동물들이 도망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 이야기 속에서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 감추어져 있다. 즉, 그 사자는 자신이 사자임을 자각하지 못했을 때에는 양으로서 살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양으로서 살 수 있는 가능성과 사자로 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동시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 태어나서 행동하는 모습으로 보면 중생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부처라는 것이다.

이 부처라는 인격을 확인해 나가는 작업이 바로 불교를 공부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위의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중요한 점 하나가 있다.
이 사자의 새끼가 그 자신이 아무리 사자가 아니라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사자인 것은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 스스로가 부처가 아니라고 부정할지라도, 우리가 부처임은 틀림없는 사실이 라는 것이다. 자기가 부처이면서도 중생이라고 생각하는 이런 면에서 부처와 중생의 차별이 생기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불교 형이상학(形而上學) 의 문제 이다. 그러면 곧바로 이 중생이 부처라고 했을 때, 왜 부처로서 의 인격을 발휘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그래서 이것 에 대한 합리적인 해결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우리는 부처는 아니다. 다만 부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 가능 성을 어떻게 잘 발현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라고 불교 형이 상학에서는 파악하였다. 또한 여기서 돈오(頓悟)니, 점수(漸修)니 하는 수행방법의 실천적인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돈오돈수(頓梧頓修)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앞서 말한 대로 모든 생명이 부처님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위의 설화 중에서 사자가 자신이 사자새끼가 아님을 아무리 주장할지라도 사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부처가 아니라고 주장해도 부처인 것만은 변할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돈오돈수란, 바로 이와 같은 돈오의 입장에서 별안간 깨닫고 그 별안간 닦음을 통해서 불성을 확인하는 길이다. 그러나 점수(漸修)의 입장은 그와 다르다. 점수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부처는 아니며, 우리들이 부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사장되지 않기 위해서 꾸준히 닦고, 노력 연마하면 언젠가 부처가 되리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돈오돈수, 돈오점수의 논쟁, 그 연원은 상당히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티베트의 수도였던 라샤라고 하는 곳에서 돈오파와 점수파의 대 논쟁이 있었던 것이 10세기 초반이다. 그때 주로 돈오를 내세우 는 이들은 중국의 선종, 즉 육조 혜능(六祖慧能)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던 선사들이었고, 점수를 주장하는 인도의 스님들은 주로 반야부(般若部)계통에 소속된 중관학파의 학승들이었다.

이 양측의 견해를 조정하기 위해서 그 중간 지점인 티베트의 라 샤에서 돈오와 점수에 대한 대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그때 그들이 주장한 논리와 근거가 참 흥미롭다. 먼저 돈오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부처의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비유를 들자면 그것은 마치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과 같다. 점수를 주장하는 이들이 서서히 닦아 나가야 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잠에 들었다가 깨어날 때를 상상해 보라. 눈을 감고 있다가 눈을 뜨면 그것이 깬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잠에서 깨기 세 시간 전에는 눈이 조금 열려 있고, 깨어나기 삼십 분전에는 눈이 반쯤 열려 있고 …… 그렇게 점차 더 열려지다가, 잠에서 다 깨어났을 때, 눈이 모두 열려진다는 것인가? 이렇게 점수파에서 주장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캄캄한 어둠이 눈을 뜨면 밝아지는 것처럼 자신이 부처임을 확인하는 그 순간, 바로 돈오의 확신이 오는 것이기 때문에 돈오돈수여야 한다. 이에 반하여 점수를 주장하는 인도 측 승려들의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인도 측 스님들은 이렇게 비판한다. 지금 돈오를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앞서 잠 깬 사람의 비유를 말했지만, 그것은 적절치 못한 비유이다.

그들의 주장은 마치 어린아이를 별안간 어른으로 키운다는 논리와 마찬가지이다. 자, 여기 어린아이와 어른이 있다고 하자. 이 어린아이는 어른 이 가진 모든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면에서 어른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가 어른과 똑같이 말하고, 어른과 똑같은 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의 힘이 미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아이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성장시켜 성인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점수란 바로 그러한 수행방법이다. 서서히 닦아나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는 순간에 언제부터인지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돈오와 점수, 이 양 수행방법에 있어서 하나의 공통된 결론이 있다. 그것은 내가 곧바로 부처이건, 내가 부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건 간에 인간은 불성의 존재라는 점이다.

인간이 불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해탈이라는 것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일체중생 실유불성'의 사고방식이《법화경》, 《열반경》그리고 드디어는《대승기신론》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주된 사상적 흐름을 이루게 되면서, 대승불교의 문화권에서는 자성성불(自性成佛)이라는 개념이 확립되게 된 것이다.

물론 후대에 발달된 선종의 이론에서도 쓰고 있는데, 선종에서는 바로 이 용어를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견성, 즉 성품을 본다는 것이다. 그때의 성품이란 무엇인가? 우리들 인격의 밑바탕에 있는 불성을 성품이라고 보았다. 그 성품을 깨달을 때 불도의 완성이 이룩된다는 것이다.

우리 중생들은 불성의 존재이다. 다만 불행하게도 그 불성을 잊 고 사는 실향민일 따름이다. 고향을 잊고 사는 우리는 그 불성이라 는 진실한 마음의 고향을 회복해야 한다. 마음의 고향을 회복한 이들이 모여 사는 사회, 그것이 바로 불국정토(佛國淨土)다. 그 불국정토는 바로 불성을 간직하고 있는 모든 생명들의 결합이라고 이해된다.

        자료출처: 동국대학교 정병조 교수님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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