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상식/교리문답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십우도,심우도(十牛圖,尋牛圖)란?

관리자 | 2006.05.15 10:59 | 조회 1234
         십우도,심우도(十牛圖,尋牛圖)란? 수행(修行)은 곧 훈련(訓練)이다. 훈련(訓練)으로써 모르는 것을 알게 되고 잘못된 습관을 고칠 수 있고 과거의 업(業)을 바꿀 수 있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 훈련을 반복하는 것을 반복(反復)의 도(道)라 하고 반복해서 훈련하는 것을 우리 불가(佛家)에서는 수행이라 한다. 수행의 분상에서 공부하는 방법이 천만방편(千萬方便)이 있고, 그 방편에 특색이 있어 수행자의 근기(根機)에 따라 맞는 방편을 택하게 된다. 십우도송(十牛圖頌)은 선(禪)의 실참수행(實參修行)방법을 알기 쉽게 제시(提示)해준 법문으로서 방황하는 중생 심리상태를 길 잃은 소에 비유하여 잃어버린 소를 찾듯이 무명으로 허덕이는 중생이 어둠을 벗어나 바른 길에 이르러 해탈을 구가하는 과정을 열 가지의 그림으로 그리고 거기에 송(頌)을 붙여 수행자의 귀감으로 삼게 한 것이다. 이 십우도(十牛圖)는 대웅전벽화(大雄殿壁畵)에 빠지지 않고 그려져 있어서 우리에게 이미 널리 알려져 친숙하지만 막상 그 내용은 확실히 알지 못하는 실정이어서 십우도송(十牛圖頌)을 풀이하고자 한다. 십우도(十牛圖)는 심우도(尋牛圖)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1)잃어버린 소를 찾아나서고(심우:尋牛) 동자승이 소를 찾고 있는 장면이다. 자신의 본성을 잊고 찾아헤매는 것은 불도 수행의 입문을 일컫는다. (2) 그 발자국을 보고(견적:見跡) 동자승이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라간다. 수행자는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본성의 발자취를 느끼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3) 그 소 자체를 보고(견우:見牛) 동자승이 소의 뒷모습이나 소의 꼬리를 발견한다. 수행자가 사물의 근원을 보기 시작하여 견성에 가까웠음을 뜻한다. (4) 소를 붙잡고(득우:得牛) 동자승이 드디어 소의 꼬리를 잡아 막 고삐를 건 모습이다.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에 있는 불성을 꿰뚫어보는 견성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5) 소를 길들이고(목우:牧牛) 동자승이 소에 코뚜레를 뚫어 길들이며 끌고 가는 모습이다. 얻은 본성을 고행과 수행으로 길들여서 삼독의 때를 지우는 단계로 소도 점점 흰색으로 변화된다. (6)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기우귀가:騎牛歸家) 흰소에 올라탄 동자승이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더 이상 아무런 장애가 없는 자유로운 무애의 단계로 더할 나위없이 즐거운 때이다. (7) 집에 와서는 소를 잊고(도가망우:到家忘牛) 소는 없고 동자승만 앉아 있다. 소는 단지 방편일 뿐 고향에 돌아온 후에는 모두 잊어야 한다. (8) 소도 사람도 함께 잊고(인우구망:人牛俱忘) 소도 사람도 실체가 없는 모두 공임을 깨닫는다는 뜻으로 텅빈 원상만 그려져 있다. (9)반본환원(返本還源):강은 잔잔히 흐르고 꽃은 붉게 피어 있는 산수풍경만이 그려져 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깨닫는다는 것으로 이는 우주를 아무런 번뇌 없이 참된 경지로서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10)입전수수(入廛垂手):지팡이에 도포를 두른 행각승의 모습이나 목동이 포대화상과 마주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육도중생의 골목에 들어가 손을 드리운다는 뜻으로 중생제도를 위해 속세로 나아감을 뜻한다. 이러한 십우도(十牛圖)는 송대(宋代)에 이르러 성행하여 여러 작품이 있었으나 유명한 것은 곽암사원(廓庵師遠)의 작품이다. 곽암(廓庵)은 벽암록으로 유명한 원오극근선사와 동문인 대수원정(大隨元淨)의 제자이며 이들은 모두 임제종 양기파에 속한다. 십우도(十牛圖)에는 곽암선사가 지은 십우도(十牛圖)제목과 송(頌)과 도(圖)에 자원(慈遠)이 지은 총서(總序)와 소서(小序) 그리고 석고(石鼓)와 만송(萬松)이 지은 화답송(和答頌)을 한데 묶어 유포되어 온 것이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 여기서는 곽암(廓庵)의 십우도송(十牛圖頌)을 살피면서 선리(禪理)의 깊은 뜻을 음미해 보고자 한다. 1. 심우(尋牛:소를 찾는다) 망망발초거추심(茫茫撥草去追尋) 수활산요로갱심(水闊山遙路更深) 역진신피무처멱(力盡神疲無處覓) 단문풍수만선음(但聞楓樹晩蟬吟) 우거진 풀 헤치며 아득히 찾아 헤매니 물은 넓고 산은 멀고 길은 더욱 아득하다. 힘이 다하고 마음도 지쳐 갈 곳 찾을 수 없는데 다만 늦가을 단풍 숲에 매미 소리만 들리네. 이 송(頌)은 잃어버린 소를 찾기 위해 찾아 나선 십우도송(十牛圖頌)의 첫 번 째 과정이다. 여기서 잃어버린 소의 뜻은 중생이 망각하고 있는 참 마음을 뜻한다. 참 마음을 상실하고 허상에 빠져 오욕을 탐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고자 발심(發心)하는 것이 곧 잃어버린 소를 찾아 나서는 것과 같음을 비유한 것이 본 송(頌)의 뜻이다. 제1구에서 망망한 광야에 우거진 풀 헤치며 아득한 길 찾아 헤매는 모습을 그린 것은 무명에 가리워진 우매한 중생이 문득 공부길로 들어서려 하나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고 막연한 길을 허덕이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 구(句)에서 아득히 헤매고는 있으나 소를 찾겠다는 일념이 있기 때문에 성도의 가능성이 보여지고 있다. 제2구에서 '물은 넓고 산은 멀고 길은 더욱 아득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은 소가 간 곳을 알지 못하고 마냥 찾아나선 답답함이 마치 수행자가 처음 발심은 하였으나 공부의 가닥이 점점 멀게만 느껴지는 모습이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더욱 분발하여 정진하는 모습이 보이는 구이다. 제3구에서 '힘이 다하고 마음도 지쳐 갈 곳을 찾을 수 없다'고 한 것은 몸과 마음을 돌보지 않고 지쳐 기진한 모습으로 신명을 다해 정진하는 수행자의 심경을 그린 뜻이다. 제4구에서 다만 늦가을 단풍 숲에 매미소리만 들린다고 한 뜻은 이미 3송에서 신명을 다해 정진하여 찾을 곳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고, 여기에서는 첫 구의 소를 찾아 풀숲을 헤치던 봄에서 어느새 세월이 바뀌어 단풍든 늦가을에 이르러 무명의 숲은 락진되어 소가 숨어 있을 산은 실체를 드러내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에 매미소리만 들린다고 한 것은 번뇌의 상념이 쉬고 소를 찾는다는 것까지 쉬어진 경지이다. 2. 견적(見跡: 발자국을 보다) 수변임하적편다(水邊林下跡偏多) 방초이피견야마(芳草離披見也?) 종시심산갱심처(縱是深山更深處) 요천비공즘장타(遼天鼻孔?藏他) 물가의 숲 속에 발자국 유달리 많은데 그대는 숲을 헤치고 보는가 마는가 설사 깊은 산 더욱 깊은 곳일지라도 먼 하늘 뚫렸으니 어찌 그를 숨기랴. 이 송(頌)에서 소의 발자국을 보았다는 것은 공부의 가닥이 잡힌 것을 뜻한다. 이미 1송에서 우거진 숲이 다 떨어져 없어지고 늦가을이 되어 산의 실체가 드러났으니 소의 발자국을 보는 것은 당연하다. 1송은 발심정진(發心精進)하는 모습이요, 본 송은 발자국을 찾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제1구에서 '물가 숲 속에 발자국이 유달리 많다'고 하여 수변임하(水邊林下)라는 한 지점을 지목했으니 공부하는 사람이 한 곳에 착안(着眼)함을 뜻하고, 한 곳에 착안한 그 곳에 발자국이 유달리 많다고 한 것은 착안한 그 자리가 모든 공부 길임을 제시해 준 것이다. 제2구에서 '깊은 숲 방초를 헤치고 보았는가'하고 물은 것은 소를 찾는 사람이 숲 속을 분주하게 다니기만 하고 숲을 헤치고 보지 못하듯이 공부하는 사람이 참선도 해보고 경전공부도 해보고 염불도 하면서 자세히 살펴 연구할 줄 모르는 이를 위하여 살펴서 찾을 것을 가르쳐 준 송문(頌文)이다. 제3구에서 설사 깊은 산 더욱 깊은 곳일지라도 하고 공부하는 사람을 채찍하는 이 뜻은 소를 찾는 이가 소를 찾기 위해서는 숲을 헤치고 보면 설사 산이 깊고 또 깊은 곳일지라도 숲을 헤치고 보아야 찾을 수 있듯이 수행자 역시 살피고 또 살핀다면 반드시 공부의 길이 확연해 질 수 있음을 일깨워 준 뜻이다. 제4구에서 '먼 하늘 뚫렸으니 어찌 그를 숨기랴' 라고 한 곳은 우선 요천비공(遙天飛空)은 먼 하늘이 뚫려 있음을 형용한 말이다. 이 말은 사방으로 뚫려있는 하늘아래 소가 숨어 있을 곳이 있겠는가 하고 반문한 뜻으로 참 마음의 실처가 백주에 소를 보듯이 극명하게 마음의 은처가 따로 있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이상과 같이 소의 발자국을 이미 보았으면 소를 보는 것이 임박했음을 뜻하는 이 송문은 공부의 가닥이 잡혔으면 바로 공부하는 것만 남아있음을 일깨워 준 구이다. 3. 견우(見牛:소를 보다) 황앵지상일성성(黃鶯枝上一聲聲) 일난풍화안유청(日暖風和岸柳靑) 지차갱무회피처(只此更無廻避處) 삼삼두각화난성(森森頭角畵難成) 꾀꼬리 가지에서 노래 부르니 따뜻한 봄바람에 강 언덕 버들잎 푸르네. 다만 다시 피할 수 없는 곳에 소 모습 삼삼한데 그리기 어려워라. 이 송(頌)에서 소를 본 것은 소를 찾은 것이고 소를 찾았다는 것은 마음(眞心)을 본 것을 의미한다. 곧 소를 찾은 경계, 마음을 본 경지에서 마음 다스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제1구에서 노란 꾀꼬리 나뭇가지에서 노래부르는 모습을 그린 것은 이미 마음의 태평을 엿 볼 수 있다. 모든 상념 다 없어지고 오로지 나뭇가지에서 노니는 꾀꼬리와 하나된 모습이 곧 수행자의 고요한 모습이다. 제2구에서 '따사한 봄바람에 강 언덕 버들잎 푸르다'고 노래한 것은 역시 마음의 구하는 바가 없으니 따뜻한 봄날 강 언덕 푸르름과 함께 태평한 모습을 그린 송이다. 제3구의 원문에 '단지 여기서 다시 회피할 곳이 없다'고 한 것은 상념이 끊어져 태평한 속에서 다시 돌진하여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모습을 그린 것이다. 백척간두에 서서 진퇴할 곳이 없는 절박한 모습은 수행자가 마음을 다잡아 잡을 수도 없고 놓을 수도 없는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친 상황이다. 제4구에서 '소 모습 삼삼한데 그리기 어렵다'고 한 것은 이미 소의 실체를 보았으나 무엇이라 딱 잡아 말하기 어려운 것을 뜻한 것으로 마음의 실체를 보고 나면 마음을 어떤 것이라 잡아 말하기 어려움을 노래한 것이다. 4. 득우(得牛:소를 얻다) 갈진정신획득거(竭盡精神獲得渠) 심강력장졸난제(心强力壯卒難除) 유시재도고원상(有時?到高原上) 우입연운심처거(又入烟雲深處居) 온 정신 다 쏟아 그 소를 잡았지만 거센 마음 거친 행동 조복받기 어렵네 어떤땐 고원상에 오르는 듯 싶더니 또다시 구름속 깊은 곳으로 숨고 마누나. 이 송(頌)에서는 잃어버린 소를 찾아 붙잡았으나 이미 분방해진 소가 쉽게 끌려오지 않는 것이 마치 수행자가 마음자리를 찾아보고 마음을 다스리려 하지만 허상에 끌려 관습에 물든 업력이 너무 커서 조복되지 않는 것을 비유하여 그린 것이다. 제1구에서는 '온 정성을 다해 잃어버린 그 소를 붙잡았지만' 하고 소를 붙잡기 위해서는 온 정성을 다해야 함을 피력하고 있다. 이는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자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갈진정신(竭盡精神) 해야 함을 강조한 뜻이다. 제2구에서는 '거센 마음과 거친 행동 제거하기 어렵다' 했으니 이는 멀리 달아난 소가 이미 분방해져서 제어하기 어렵듯이 업력에 물든 수행자의 마음 또한 조복받기가 쉽지 않음을 가르쳐서 업력을 제어할 수 있는 대분심을 촉발시켜준 송이다. 제3구에서 '어떤 때는 고원상에 오르는 듯 싶더니' 하고 갈피가 묘연함을 노래한 것은 마음의 움직임이 번갯불 같고 형상이 그림자와 같아서 도무지 붙잡히지 않음을 비유하여 그린 것이다. 제4구에서 '또다시 구름 속으로 숨고 마누나' 하고 노래 한 것은 마음의 당처를 보고 붙들려고 하지만 쉽게 조복되지 않는 것이 잃어버린 소를 찾아 붙잡았으나 쉽게 붙잡히지 않음을 노래하여 수행자로 하여금 구경지에 이르기까지는 잠시도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됨을 일깨워준 頌이다. 5. 목우(牧牛:소를 길들이다) 편견시시불리신(鞭牽時時不離身) 공이종보입애진(恐伊縱步入埃塵) 상장목득순화야(相將牧得純和也) 기쇄무구자축인(?鎖無拘自逐人) 채찍과 고삐 잠시도 몸에서 떼지 않는 것은 혹시라도 그가 흙먼지 속으로 들어갈까 두려운 것이라 서로 잘 이끌고 이끌려 온순해지면 묶어 놓지 않아도 스스로 사람을 따르리. 이 송(頌)에서는 마음 다스리는 것을 소 길들이는데 비유했다. 잃어버렸던 소를 찾아 붙들었으나 이미 야성(野性)에 길들여진 소가 순순할 리가 있겠는가. 꾸준한 노력과 길들이는 방법이 필요하다. 제1구에서는 '채찍과 고삐를 잠시도 몸에서 떼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는 야성화(野性化)된 소를 길들이는 과정으로서 오랜 겁동안 속화된 마음을 채찍으로써 다스리고 고삐로써 조절하듯 마음을 다스리고 조절해야함을 비유한 그림이다. 제2구에서 '혹시라도 그가 흙먼지 속으로 들어갈까 두려워한다'고 한 것은 조금이라도 방심(放心)하면 누겁(累劫)의 업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다시 야성으로 돌아갈까 염려한 것이니, 공부는 반드시 최후까지 다스리고 조절함을 방심해서는 안되는 것을 가르쳤다. 제3구에서 '서로 잘 이끌고 이끌려 온순해지면' 하고 노래한 것은 다스리고 조절하는 대로 이루어짐을 말한 것으로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력이 필요했겠는가를 생각해서 수행에는 오로지 간단(間斷)이 없어야 한다. 제4구에서 '묶어놓지 않아도 스스로 사람을 따르리' 하고 결론지은 것은 채찍질하고 고삐 조여서 연마하고 단련하여 더 이상 조절하고 다스릴 것 없는 자리에 이르렀음을 말한 뜻한다. 이와 같이 수행자는 부족함과 남음이 없도록 경책 정진을 쉬어서는 안된다. 6. 기우귀가(騎牛歸家: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옴) 기우이리욕환가(騎牛??欲還家) 강적성성송만하(羌笛聲聲送晩霞) 일박일가무한의(一拍一歌無限意) 지음하필고순아(知音何必鼓脣牙) 소를 타고 한가로이 집으로 향하니 목동의 피리소리마다 저녁 노을 보내네. 한 박자 한 가락 한 없는 뜻을 소리를 아는 이여 무슨 말이 필요하랴. 잃어버린 소를 찾아서 야성을 다스려 소를 능히 어거한 이 송의 뜻은 중생이 억겁의 업진을 벗어버리고 홀가분해진 경지를 노래한 시이다. 제1구에서 '소를 타고 한가로이 집으로 향한다'고 한 것은 이미 소를 다스려 자유로이 어거함을 말한 것으로, 밖으로 흩뜨러진 마음을 수습하여 치달리고 허덕이는 번뇌가 끊어져서 마냥 한가로이 집으로 향하는 풍광이 선해옴을 느끼게 하면서 다같이 발심(發心)을 촉구하게 하는 구절이다. 제2구에서 '목동의 피리소리마다 저녁 노을 보낸다'고 한 이 구절은 시(詩)가 표출할 수 있는 극치로서 무위도인의 경지요 일 마친 태평스러움 그 자체이다. 제3구에서 '한 박자 한 가락 한없는 뜻이라' 한 것은 무위도인(無爲道人)의 안목으로 천하 사물을 보면 한 박자 한 가락 아님이 없고 한 박자 한 가락 속에 천하 만물의 이치 아님이 없으니 이 소식을 누가 아는가? 제4구에서 '소리를 아는 이여 무슨 말이 필요하랴' 하였으니 이는 이미 송문에서 언어도(言語道)가 끊어져서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음을 노래했다. 7. 망우존인(忘牛存人:소를 잊고 사람만 있다) 기우기득도가산(騎牛己得到家山) 우야공혜인야한(牛也空兮人也閒) 홍일삼간유작몽(紅日三竿猶作夢) 편승공돈초당한(鞭繩空頓草堂閒) 소를 타고 이미 고향집에 돌아오니 소는 이미 없고 사람 또한 한가롭네 해 떠 오른지 석 자인데 아직 꿈 속에 있고 채찍 고삐 쓸데 없고 초당도 한가롭네 이 송(頌)은 이미 야성화(野性化)된 소를 길들여 집으로 돌아와서 태평한 경지를 노래한 시(詩)로서 본래 부족함이 없고 맑고 깨끗해서 시비가 없던 집을 나와 갈 곳 없이 방황하던 중생이 업진의 마음을 돌이켜 고향에 돌아와 담담하게 편안함을 그린 노래이다. 제1구에서 '소를 타고 이미 고향에 돌아오니' 하고 일단 안도의 경지를 노래한 것은 그동안 험란하고 고통스러웠던 것을 상기하면서 동시에 안온함을 드러낸 것이다. 천하의 명승지를 두루 돌아보고도 집에 돌아와야 비로소 편안할진댄 하물며 온갖 고초를 다 겪은 분상에서있겠느가. 제2구에서 '소는 이미 없고 사람 또한 한가롭네' 한 것은 다스리고 조절해야 할 마음이 본래 없고 번뇌의 탐진치(貪瞋癡) 또한 없으니 그 주인이야 얼마나 한가하겠는가. 제3구에서 '해 떠오른 지 석 자인데 아직 꿈속에 있고' 하고 한가로움의 극치를 노래했다. 여기에서 해 떠오른 지 석 자인데 꿈마저 없구나 하지 않고 아직 꿈을 꾼다고 한 것은 경계(境界)를 쉬어 소는 잊었으나 자신마저 잊지 못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꿈꾸는 모습이 태평하게는 보이지만, 수행자가 극복해야 할 큰 과제가 꿈이기 때문이다. 제4구에서 '채찍, 고삐 쓸데없고 초당도 한가롭네' 한 이 구절은 소가 이미 순순해져서 채찍과 고삐가 소용없듯이 자기를 다스리고 조절하는 방편이 소용없는 경지로써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참으로 한가하여 자신마저 잊을 수 있는 준비가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8. 인우구망(人牛俱忘:소와 사람 모두 잊다) 편견인우진속공(鞭牽人牛盡屬空) 벽천요활신난통(碧天遼闊信難通) 홍로염상쟁용설(紅爐焰上爭容雪) 도차방능합조종(到此方能合祖宗) 채찍과 고삐 사람과 소 모두 없으니 푸른 하늘 멀고 넓어 진실로 통하기 어렵네 붉은 화롯불 속에 어찌 눈을 용납하랴 이제야 바야흐로 조사의 뜻 얻었다하리. 이 송(頌)은 물이 물을 씻지 못하고 눈이 눈을 볼 수 없듯이 번뇌가 끊어진 경지에서는 모두 텅 비어 허허로움을 묘사하고 있으며, 또한 한 티끌도 용납하지 않는 祖師의 경지를 설파하고 있다. 제1구에서 '채찍과 고삐 사람과 소 모두 없다' 하여 닦을 것과 닦을 자 모두 없는 경지를 설파하여 청정무구한 진인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제2구에서 '푸른 하늘 멀고 넓어서 진실로 통하기 어렵다' 한 것은 사람도 잊고 소도 잊은 경지는 푸른 하늘과 같이 멀고 넓어서 누구도 엿볼 수 없고 쉽게 통할 수 없음을 뜻한 구절이다. 제3구에서는 '붉은 화롯불 속에 어찌 눈을 용납하랴' 한 것은 훨훨 타오르는 용광로의 불길을 눈이 내리는 것으로 어찌하지 못하듯이, 수행자의 뜨거운 불길은 세속의 어떠한 경계라도 용납하지 않는 비유로써 대분심(大忿心)이 사무치고 신심(信心)이 사무치고 의문이 사무치는 분상을 설파한 구절이다. 제4구에서 '이제야 바야흐로 조사의 뜻 얻었다' 하리 한 이 구절은 앞에서 말한 제3구의 경지, 곧 타오르는 용광로가 어떠한 것도 용납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야 바야흐로 조사의 종지에 합해서 더 닦을 것 없는 자리가 된다는 뜻이다. 9. 반본환원(返本還源:본래 자리로 돌아오다) 반본환원이비공(返本還源已費功) 쟁여직하약맹농(爭如直下若盲聾) 암중불견암전물(庵中不見庵前物) 수자범범화자홍(水自范范花自紅) 근본자리로 돌아오고자 무던히도 애썼구나 그것이 어찌 귀머거리, 장님만 같겠는가. 집에서 집 앞의 물건도 보지 않으니 물은 스스로 흐르고 꽃은 스스로 붉게 피네 이 송(頌)은 본래 자리로 돌아온 소식을 노래한 시이다. 이 송에서 본래 자리로 돌아온 경지 쉬어진 경지 방편이 소용없는 경지를 짐작할 수 있다. 혹 수행자가 공부마치고 나면 특별한 경지, 특별한 능력을 생각하게 되지만 여기에서 조사 선지식(善知識)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엿볼 수 있어서 본 십우송(十牛頌)이 공부하는 분상에 귀감이 되는 것이다. 제1구에서 '근본자리로 돌아오고자 무던히도 애썼구나' 한 것은 돌아오고 나서 보니 이렇듯 안온하기만 한데 긴 세월 밖으로 돌았던 어리석음에서 돌아오고자 발심하여 채찍으로 다스,리고 고삐로 조절했던 공력이 지대했음을 말한다. 제2구에서 '그것이 어찌 귀머거리, 장님됨만 같겠는가' 한 것은 본래 자리로 돌아오고자 애쓴 공력이 어찌 처음부터 귀로 끌려가지 않고 눈으로 끌려가지 않음만 같겠는가 하는 뜻으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끌려가지 않았던들 당초에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3구에서 '집에서 집 앞의 물건을 보지 않으니' 한 이 구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집 앞에서 집 앞 물건도 보지 못한다는 뜻이 있고 하나는 집에서 집 앞 물건도 보지 않는다는 뜻이 있다. 여기에서는 물건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미혹이 남아 있는 말이 되므로 보지 않는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 보지 않는다는 것은 보고 동(動)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제4구에서 '물은 스스로 흐르고 꽃은 스스로 붉게 피네' 하였는데 이것은 곧 천지의 진면목이며 대자연의 이치이다. 천지의 진면목에 맡기고 대자연의 이치에 맡길 때 비로소 참으로 평온한 경지이며 일없는 경지입니다. 이러한 경지는 채찍과 고삐로써 다스리고 조절하여 수없이 용광로에서 단련을 거듭하고 나서 얻어지는 경지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10. 입전수수(入廛垂手:시중에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다) 노흉선족입전내(露胸跣足入廛來) 말토도회소만시(抹土塗灰笑滿?) 불용신선진아결(不用神仙眞我訣) 진교고목방화개(眞敎枯木放花開) 가슴을 헤치고 맨발로 시중에 들어와서 흙먼지 묻은 얼굴 웃음이 가득하네. 신선의 진짜 비결 쓰지 않고도 곧바로 고목에 꽃을 피우네. 이 송(頌)은 이미 수행(修行)을 성취한 수행자가 최종적으로 해야할 일을 제시한 송이다. 여기서 입전수수란 공부를 마친 수행자가 산중에서 나와 시중에 들어와 중생에게 손길을 내린다는 뜻으로 곧 중생제도의 원력을 말한 것이니다. 제1구에서 '가슴을 열고 맨발로 시중에 들어온다' 고 한 것은 마음을 열고 상황을 가리지 않는 자비심으로 중생에게 다가서는 것을 말한다. 만약 수행자가 제도할 대상을 가린다면 자비심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2구에서 '흙먼지 묻은 얼굴 웃음이 가득하네' 라고 한 것은 중생을 가리지 않고 가난하거나 병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자비심이 충만한 모습을 말한 것이다. 중생으로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하는 마음에는 항상 웃음이 가득할 수 밖에 없다. 제3구에서 '신선의 진짜 비결 쓰지 않는다' 한 것은 신선의 신통묘용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중생을 교화하는 일은 수행자의 일상적인 일로써 굳이 교화의 방편이 따로 필요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제4구에서 '곧바로 고목에 꽃을 피우네' 한 이 구절은 다겁(多劫)의 업에 의해 허덕이는 중생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새로운 삶을 제시해 준다는 뜻이다. 일에는 목적(目的)이 있어야 하고 수행(修行)에는 성취(成就)가 있어야 하고 성취는 곧 회향(回向)으로 이어져야 한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