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상식/교리문답
벼랑 끝에 선 고려 태조 왕건을 살린 은신처, 비슬산 은적사

대장경이란?

관리자 | 2006.05.16 10:20 | 조회 1151
   대장경(大藏經) 이란? 대장경(大藏經)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經)과 율(律), 그리고 그 주석서인 논(論), 즉 삼장(三藏)을 모은 총서를 말한다. 이 삼장이 중국, 티베트, 한국, 일본 그리고 남방으로 전해지면서, 번역되어 많은 대장경이 성립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고려대장경, 대정신수대장경, 만자속장경, 남전대장경, 국역일체경, 한글대장경 등이 있다.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은 고려시대 조성된 대장경이다. 고려시대 대장경 조판은 세 번 있었다. 초조대장경과 속장경, 재조대장경이다. 현재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은 재조대장경이다.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은 다카쿠스 준지로에 의해 다이쇼(大正) 11년인 1922년에 기획돼 1932년 2월 완성됐다. 만자속장경(卍字續藏經)은 일본에서 1902년에 착수해 1912년 150책으로 완성시킨 대장경으로, 대일본속장경(大日本續藏經)이라 한다.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은 1881년 리스 데이비즈가 팔리어성전을 로마자로 간행하여, 이를 저본으로 1935년부터 일본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여 1941년에 65권 70책으로 완간한 것이 남전대장경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부처님을 따르던 수많은 제자와 중생들에게 한 설법과 교화 내용은 생전에는 문자로 기록되지 못했다. 80생애를 마치고 열반에 드신 후 제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겨야 할 절실한 필요성을 느기게 되었고 그리하여 만들기 시작한 최초의 기록이 패엽경(貝葉經)이다. 패엽경이란 최초의 불교 결집에서 만들어진 결집경전(結集經典)으로 패다라(貝多羅)에 송곳이나 칼끝으로 글자를 새긴 뒤 먹물을 먹여 만들었다.  패다라는 인도에서 종이 대신 글자를 새기는 데 쓰였던 나뭇잎을 말하는데, 흔히 다라수(多羅樹) 잎이 많이 쓰였으므로 그렇게 불려졌다.  다라수는 종려나무와 비슷하고, 그 잎은 바탕이 곱고 빽빽하고 길다.  글 쓰느데 사용하려면 말려서 일정한 규격으로 자른 다음, 칼이나 송곳으로 자획(刺劃)을 만들고 먹을 넣는다.  그 크기 6~7 센티미터, 길이 60~70 센티미터 정도이며 양쪽에 구멍을 뚫어 몇십 장씩 실로 꿰어 묶어둔다.    패엽경이 최초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부처님이 돌아가시던 해였다.  제자들은 생전에 부처님께서 설파한 가르침으 흩어지지 않게 보존하기 위해 각자 들은 바를 여시아문(如是我聞), 즉 ‘내가들은 바는 이와 같다.’고 하여 서로 논의하고 모아서 결집(結集)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왕사서의 칠엽굴에서 가섭(迦葉)을 상좌로 500명의 비구가 모여 경(經), 율(律), 2장(藏)의 정리하여 다라수 잎에 새긴 것이다.이후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하여 널리 반포할 목적으로 간행한 기록을 모두 대장경(大藏經)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대장경은 일체경(一切經), 삼장경(三臧經) 또는 장경(藏經)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의 삼장으로 구성된다. 삼장(三臧)이란  인도의 고대언어인 산스크리트(梵語)혹은 빨리(Pali)어로 된 뜨리삐따까(Pitaka)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경장이란 부처님께서 따르는 제자와 일반 대중을 상대로 설파한 내용을 기록한 경을 담아 놓은 광주리란 뜻이고, 율장은 제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戒律)의 조항과 그밖에 공동생활에 필요한 규범을 적어 놓은 율을 담은 광주리란 뜻이다.  노장은 위의 경과 율에 관하여 스님들이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달아 놓은 글, 즉 논을 담은 광주리란 뜻이다. 처음엔 이 세 가지 종류의 부처님 말씀을 기록하기 위해 다라수 외에도 나뭇잎, 대나무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였는데 부처님이 태어난 아열대 지방의 기후는 너무 덥고 습하여 오랫동안 보존 할 수 없었으므로 못쓰게 되면 다시 만드는 일을 반복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기록의 내용은 조금씩 달라지고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여러 종파들은 제각기 다른 대장경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대표적인 것이 지금 산스크리트어 혹은 빨리어로 기록된 뜨리삐따까이다 차츰 여러 종파의 인도불교는,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사성제. 팔정도를 닦아나가는 엄격한 자기 수행 중심의 소승불교에서, 중생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부처님의 경지에 다다르게 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대중적 대승불교로 통합되고 경, 율, 논 삼장의 내용을 정비하면서 인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그러나 아직은 오늘날 남아있는 것과 같은 형식의 대장경이 없는 상태에서 중국으로의 포교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중국에 불교가 전해지게 되면서 인도어로 된 불경들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처음에 산발적이었던 번역사업은 포교활동과 함께 당시 나라를 통치하던 지배계층이 관심을 갖게 되자 활기를 띠기 시작 하였다. 불경의 번역사업은 통치의 한 수단으로 국가적인 행사가 되었으며 최초로 동진(東晋)의 도안(道安) (344~385)이 한나라 이래의 각종 번역 불경의 총목록을 작성한 이후 당나라 개원 18년인 730년 지승(智昇)이 쓴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이라는 번역서 목록 등은 번역불경을 정리한 좋은 예였다. 중국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져오던 불경의 번역사업이 체계적으로 정일되기 시작한 연대는 양.진 시대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실제로는 수.당 시대까지도 손으로 베껴쓰는 필사본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필사본 번역불경은 옮겨 쓰는 과정에 이중으로 번역되거나 잘못 번역하는 등 정확을 기하지 못했고 종이가 흔치 않았던 시절이므로 나뭇잎, 대나무, 나무 껍질 등의 사용으로 보관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자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한 재료를 찾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돌을 재료로 한 석판(石板)대장경. 금속판에 새긴 금속판대장경도 쓰이게 되었다.  중국 운거서 방산석경 1만여 장은 지금 남아있는 가운데 대표적인, 돌로 만든 대장경이다.  그러나 취급과 보존, 또 인쇄하여 널리 알리는데 편리한 점을 고려한다면 나무를 대신할 만한 재료가 없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목판(木板)대장경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알림] 본 자료는 대전 계족산 용화사에서 제공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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